믿음의 사람들

[스크랩] 길선주,김익두,이용도목사의 부흥운동

사랑으로 부르심 2007. 12. 28. 20:09
길선주,김익두,이용도목사의 부흥운동
글쓴이 : 호도알 번호 : 165 조회수 : 14 2007.05.18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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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Ⅰ. 서론■■■■■■■■■■■■■■■■■■■■■■■■■■■■■■■■■■■■■■■■■■■■■■■■■■■■■■■■■■■■■■■■■■■■■■■■■■■■■■1
    A. 연구의 목적■■■■■■■■■■■■■■■■■■■■■■■■■■■■■■■■■■■■■■■■■■■■■■■■■■■■■■■■■■■1
    B. 연구의 방법과 범위■■■■■■■■■■■■■■■■■■■■■■■■■■■■■■■■■■■■■■■■■■■■■■■4
    C. 부흥운동의 성서적 이해■■■■■■■■■■■■■■■■■■■■■■■■■■■■■■■■■■■■■■■■6
Ⅱ. 길선주 목사의 부흥운동■■■■■■■■■■■■■■■■■■■■■■■■■■■■■■■■■■■■■■■■■■■■11
    A. 생애요약■■■■■■■■■■■■■■■■■■■■■■■■■■■■■■■■■■■■■■■■■■■■■■■■■■■■■■■■■■■■■■■11
    B. 시대적 배경■■■■■■■■■■■■■■■■■■■■■■■■■■■■■■■■■■■■■■■■■■■■■■■■■■■■■■■■■■15
    C. 부흥운동의 특징■■■■■■■■■■■■■■■■■■■■■■■■■■■■■■■■■■■■■■■■■■■■■■■■■■■20
    D. 부훙운동의 평가■■■■■■■■■■■■■■■■■■■■■■■■■■■■■■■■■■■■■■■■■■■■■■■■■■27
Ⅲ.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31
    A. 생애요약■■■■■■■■■■■■■■■■■■■■■■■■■■■■■■■■■■■■■■■■■■■■■■■■■■■■■■■■■■■■■■■31
    B. 시대적 배경■■■■■■■■■■■■■■■■■■■■■■■■■■■■■■■■■■■■■■■■■■■■■■■■■■■■■■■■■■38
    C. 부흥운동의 특징■■■■■■■■■■■■■■■■■■■■■■■■■■■■■■■■■■■■■■■■■■■■■■■■■■■41
    D. 부흥운동의 평가■■■■■■■■■■■■■■■■■■■■■■■■■■■■■■■■■■■■■■■■■■■■■■■■■■45
Ⅳ.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48
    A. 생애요약■■■■■■■■■■■■■■■■■■■■■■■■■■■■■■■■■■■■■■■■■■■■■■■■■■■■■■■■■■■■■■■48
    B. 시대적 배경■■■■■■■■■■■■■■■■■■■■■■■■■■■■■■■■■■■■■■■■■■■■■■■■■■■■■■■■■■52
    C. 부흥운동의 특징■■■■■■■■■■■■■■■■■■■■■■■■■■■■■■■■■■■■■■■■■■■■■■■■■■■55
    D. 부흥운동의 평가■■■■■■■■■■■■■■■■■■■■■■■■■■■■■■■■■■■■■■■■■■■■■■■■■■60
Ⅴ. 세 부흥운동의 차이점■■■■■■■■■■■■■■■■■■■■■■■■■■■■■■■■■■■■■■■■■■■■■■■■65
    A. 특징과 성격에 있어서 보이는 차이점■■■■■■■■■■■■■■■■65
    B. 시대적 흐름의 구분에서 보이는 차이점■■■■■■■■■■■■75
Ⅵ. 세 부흥운동의 공통점■■■■■■■■■■■■■■■■■■■■■■■■■■■■■■■■■■■■■■■■■■■■■■■■83
    A. 세 목사의 개인적 중생에 근거한 부흥운동■■■■■■83
    B. 일제하에 복음적 소망을 심어준 부흥운동■■■■■■■■■88
Ⅶ. 결론■■■■■■■■■■■■■■■■■■■■■■■■■■■■■■■■■■■■■■■■■■■■■■■■■■■■■■■■■■■■■■■■■■■■■■■■■■■■96
    A. 요약■■■■■■■■■■■■■■■■■■■■■■■■■■■■■■■■■■■■■■■■■■■■■■■■■■■■■■■■■■■■■■■■■■■■■■96
    B. 발견점과 연구의 결과■■■■■■■■■■■■■■■■■■■■■■■■■■■■■■■■■■■■■■■■■97

참고문헌■■■■■■■■■■■■■■■■■■■■■■■■■■■■■■■■■■■■■■■■■■■■■■■■■■■■■■■■■■■■■■■■■■■■■■■■■■102

  

 Ⅰ. 서론
   
 A. 연구의 목적

로빈슨(Robinson)교수는 역사(歷史)란  “인간이 과거에 행하고 생각하고 희망하고 혹은 느꼈던 것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했다. 카아(E. H. Carr)는 일반역사를 정의하면서 “역사는 해석인 것이다.”라고 표현하였고 “역사가와 사실의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강조했다. 유세비우스(Eusebius)는 자신이 교회의 역사를 기록하는 목적이 “주님의 시대부터 오늘까지 이어온 거룩한 사도들의 일을 기록하는 것이다.”라고 역사기록의 목적을 밝혔고, 이형기 교수는 세계교회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현재는 과거의 결과요, 동시에 미래의 씨앗이다. 현재 교회의 다양한 기능들은 과거의 결과요, 미래의 씨앗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계속 설명하기를 “교회의 현세적 기능들과 미래적 기능들은 교회의 과거인 교회사를 통해서 조명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비추어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고 이해하는 것이 단지 사실전달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키는 가장 중요한 연구이며 작업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 할 수 있다. 그래서 일찌기 볼테르(Voltaire)는 신학적 해석을 통한 역사의식과 역사철학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와 교회사에 대한 이해와 함께 김인수(金仁洙) 교수는 특히 한국의 역사와 한국교회사(韓國敎會史)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한국교회사에 대한 올바르고 정당한 역사의 인식이 없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라면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역사책이 많지 않은 것 같다. 한국사람들은 대체로 자기들의 역사를 잘 모르고 있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역사의 교훈을 모르기 때문에 역사속에서 일어난 비극을 되풀이한다. 한국 사람들이 자기들의 역사를 잘 모르듯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한국의 교회 역사를 잘 모른다. 서양의 역사나 서양 교회사는 제법 많이 아는 사람들도 우리나라 역사나 우리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다.

우리 한국교회사 백년은 하나님의 역사요, 그 백성들의 역사이다.우리는 한국사람들이고,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한국교회에서 목회하고 배우며, 한국에서 한국사람들과 만나며, 한국교회안에서 나름대로의 한국교회 역사의 한 부분을 만들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특히 우리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온 교회의 한 부분임을 주장해오며 이 교회는 시대를 거슬러 온 세상교회의 한 부분임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교회가 100년 이상의 역사가 흘렀으면서도 한국교회의 역사와 사건들 그리고 그 인물들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문제이며 아픔인 것이다.
지금 세계는 역사의 무대 위에서 어지럽게 변화하고 있다. 서양(유럽과 미국)이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그 동안의 정치■군사적, 경제■문화적 지배권을 상실함에 따라, 다른 정치■군사적, 경제■문화적 힘들의 중심이 등장하였다. 우리는 지금 다중심(多中心)의 세계 혹은 힘의 다변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의 세계는 다양한 지역화와 세계화 혹은 지구촌화가 맞물려 있다. 이러한 세계변화의 추세에 맞추어 우리한국도 변하고 있으며 우리 한국교회도 변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최근에 들어서면서 한국교회의 성장은 매우 둔화되기 시작했고 교회를 향한 비판의 소리가 드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 한국교회의 상황은 이 난국을 헤쳐나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또한 현대는 지도자와 인도자의 부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기독교계는 더욱더 그렇다. 곳곳에서 좋은 지도자와 인도자를 목마르게 찾고 있는데 학위를 가진 사람도 많고 지도자와 인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도 많고 스스로 지도자나 인도자로 자처하는 사람도 많이 있으나, 올바른 지도자와 인도자의 모습으로 성장하며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아 안타까움을 경험하고 있다. 이성희 목사는 “최근 한국교회의 이러한 침체는 한국교회가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회에 대처할 적응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본다.”라고 설명하면서 한국교회가 지니고 있는 위기상태에 경종을 울렸다. 또한 그는 역사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역사란 과거 사건의 고리가 아니라 미래 사건을 위한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중요성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이러한 모든 위기상태의 근본은 시대에 따른 과거 한국교회의 역사적 교훈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미래적 상황대처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이러한 시대적 위기상황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하여 21세기를 향한 한국교회사적(韓國敎會史的) 해결을 모색하기 위하여 과거 한국교회의 신앙의 선배 세 명을 연구하기로 하였다. 바로 한국교회의 부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하나님의 사도 길선주(吉善宙: 1869̴1935) 목사와 김익두(金益斗: 1874̴1950) 목사 그리고 이용도(李龍道: 1901̴1933) 목사이다. 이 세 명의 목사를 통하여서 그들이 보였던 부흥운동과 그 특징들 그리고 그 부흥운동이 그 시대에 끼쳤던 영향들을 살펴보고 또한 이 세 명의 목사가 보인 각각의 부흥운동에 대한 비교분석(比較分析)을 통하여 오늘날의 상황에 재조명하려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B. 연구의 방법과 범위

라투렛(Latourett)은 역사연구자가 역사를 서술하며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여려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역사가의 어려움은 우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때까지의 다양한 역    사적 해석을 모두 수용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아무런 비판과 검증없이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가는 그것들 중에서 기본적인 사료를 선택해야만 역사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김인수 교수도 역시 역사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평가하고 연구함에 있어 나타나게 되는 방법론과 그 한계점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역사에 나오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평가하는 사람의 시대와 위치에 따라, 그리고 평가자가 사용한 사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역사 기술의 한계이다. 따라서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한 시대의 한 사가에 의해 평가된 것이 전부일 수 없고 항상 재해석되고 재평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기술에 쓰여진 사료의 검증과 진위의 규명도 후세 사가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 작업 중에 하나이다. 한국 교회의 역사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직결되어 있다■■그러므로 새로운 사료가 발굴되고 새로운 증인이 나타났을 때 지금까지의 역사기록이 수정되고 바로 잡혀져야 되는 것이 사학도가 감당할 일 중 하나이다.
우리가 이 논문에서 살펴보게 될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와 그들의 부흥운동에 대한 역사적 연구도 당연히 위와 같은 한계점과 범위를 지니고 진행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논문에서는 제Ⅰ장 C. 에서 부흥운동의 성서적 이해를 간략하게 언급한 다음에 차례대로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에 대한 인물연구와 그들의 부흥운동에 대한 서술을 먼저 하려고 한다. 제Ⅱ장에서는 길선주 목사를, 제Ⅲ장에서는 김익두 목사를, 제Ⅳ장에서는 이용도 목사를 연구하고 이들을 연구함에 있어 각각 그 목차를 A. 생애요약, B. 시대적 배경, C. 부흥운동의 특징, D. 부흥운동의 평가 등으로 차례를 나누어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제Ⅴ장에서는 이 세 목사가 인도한 부흥운동의 차이점을 A. 특징과 성격에 있어서 보이는 차이점, B. 시대적 흐름의 구분에서 보이는 차이점으로 나누어 상호비교분석을 해보고, 반대로 제Ⅵ장에서는 이 세 목사가 주도한 부흥운동의 공통점을 A. 세 목사의 개인적 중생에 근거한 부흥운동, B. 일제하에 복음적 소망을 심어준 부흥운동으로 나누어 상호비교분석을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Ⅶ장에 들어가서는 이때까지의 연구과정을 요약하고 연구의 결과를 나열하는 것으로 본 논문의 끝을 맺으려 한다.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와 그 부흥운동을 비교분석함에 있어 중심이 되는 것은 비교되어지는 위에 나열된 주요사항과 특정내용에 있으므로 비교사항에 들지않는 일반적인 세 인물의 개인적 전기와 그 외의 일부사항들은 요약으로 처리하게 되었음을 알려드리며, 동시에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를 개인적인 상황에서 분석한 연구물과 자료는 비교적 많이 있으나 반대로 이 세 명의 목사와 그 부흥운동을 서로 비교분석해 놓은 명쾌하고도 분명한 서적이나 논문 등은 의외로 빈약하여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를 비교분석함에 있어 본 논문은 그들의 개인적 사항을 연구한 자료를 기초로 하여 이들을 상호비교분석하였다는 점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그리고 부흥운동의 시대적 배경을 1907년 전후와 191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로 잡고서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을 살펴 볼 것이다.   

    C. 부흥운동의 성서적 이해
   
성경에서 말하는 부흥운동의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하박국 3:2 에는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시편 85:6 에는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쁘시게 하시겠나이까?” 시 71:20 에는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디모데 전서 1:6 에는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해 너로 생각나게 하노니,” 계시록 3:19 에는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신■구약성경에 나타난 부흥은 “다시 살리다” “소성케 하다” “불일듯 하게 하다” “처음행위를 가지게 하다” “열심을 내게하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부흥운동이란 다시 살리는 운동, 처음으로 돌아가는 운동임을 알 수 있다. 신앙이 침체하여 있고 생명력을 상실해 갈때 활력과 생기를 불어 넣어주고 불일듯하게 하는 것이 부흥운동의 성경적 의의라고 할 수 있겠다.
부흥운동에 대한 두가지 상반된 해석이 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순수한 성령부흥운동이라는 해석과 종교적 감성주의와 열광주의가 종합된 혼합형식의 대중 운동이라는 해석이다. 이 두가지 해석과 그 경향성에 대하여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으나 기독교사를 면밀하게 분석해 본다면 후기의 경향을 띤 부흥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자의 경우가 더 많았음을 볼 수가 있다.  또한 그 운동들로 인해 나타난 결과들과 그 긍정적 영향력을 살펴볼 때에  우리는 이 모든 부흥운동들이 개인적으로나 대중적으로 성령의 특별한 역사에 의해서 일어났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그러한 큰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부흥운동의 신학적 근거는 반드시 성령의 역사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
구약은 역사와 율법과 예언서로 주요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구약의 전반적인 흐름속에는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길이 전개되며 인간은 죄인임을 깊이 깨닫게 하였다. 구약의 근본적 주제는 역사속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이며 운명과 심판은 계명을 지키거나 깨는데 달려있는 것이다. 즉 종교적인 타락의 시기에 하나님의 선지자 혹은 예언자들이 일어나서 침체되어있는 국민들의 신앙을 다시 불러일으켜 여호와 종교로 되돌아 오도록 하는 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보다도 피조계와 인간 안에 하나님의 영이 생존하고 있다는 것과, 특히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공급해 주는 것을 체험하며 살았다. 이런 경험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성령이 이스라엘 민족의 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전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그 성령이 사역하고 계심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이스라엘인의 역사는 성령의 보호 아래에서 생존한 민족이다.
구약시대의 부흥운동은 개인이나 한 도시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전국민적인 운동이었고 철저히 회개하는 운동이었다. 대표적인 부흥운동을 들어보면 미스바의 부흥운동, 갈멜산의 부흥운동, 니느웨의 부흥운동, 요시야왕의 부흥운동, 에스라의 부흥운동 등을 들 수가 있는데 이러한 부흥운동들은 민족적이며 죄에 대한 회개의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잘못된 죄과를 깨닫고 회개가 성취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신약시대의 진정한 부흥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복음서에서는 여러 부분에서 하나님의 내재성이나 예수의 내재성을 말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불꽃같은 견책을 거듭하고 그의 설교와 그의 대속적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구약의 국가적 교회를 신약의 교회로 변형시킬때의 이 새로운 제도의 영적 본질을 명확히 지적하셨다. 예수님은 교회가 세워져야 할 원리들을 가르치셨던 것이다. 이 새로운 제도인 교회가 오순절의 성령의 임재로 탄생하게 되었고 새로운 부흥운동의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신약시대에 있어서 또한 오순절의 부흥운동은 가장 대표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복음은 오순절의 폭발적 선교활동을 계기로 점차 전 세계에 전파되어 나갔다. 사도행전 교회 즉 최초의 원시 기독교회는 이처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발생하였다. 이와같은 초대교회의 부흥양상은 우선 그 숫자의 증가에서 부터 나타난다. 신약시대의 교회는 예수와 그 제자들의 친교로 시작되었기에 오순절을 교회의 생일이라 할 수는 없으나 복음전파의 한 기원이요, 제자들의 그리스도 임재 신념의 강화와 선교 및 첫 신자 증가의 특기할 날이라 할 수 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요엘 2:28) 와 같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는 사도 베드로가 증거했듯이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있은 후 오순절에 시작이 되었다. 이것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종교 부흥운동이었다. 기독교회 역사에 첫번째 되는 위대한 부흥운동이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부흥은 성령이 역사하지 않을때에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도행전 8:14̴17에 사마리아 교회에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의 부흥운동으로 인하여 성령이 임하였고 사도행전 10:44̴46에 고넬료의 가정에 베드로의 설교에 의해서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했고 사도행전 19:1̴8에 에베소 교회에 바울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바울서신이나 기타의 서한에는 예수에 대한 신앙의 재확인과 그에 대한 충성과 매일매일 생활이 예배와 증거의 생활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신앙생활이 미지근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믿음의 경기장을 열심히 달음질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Ⅱ. 길선주 목사의 부흥운동

    A. 생애 요약

    1. 출생부터 기독교 입신 전까지
    
길선주(吉善宙)목사는 성균관 박사 길재(吉再)의 19대 손으로 1869년 3월 15일 평남 안주군 성내 후장동에서 길봉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선주이고 자는 윤열(潤悅)이며 도호는 영계(靈溪)이다.
그의 부친은 무관으로 엄격했을뿐만 아니라, 건강, 지식, 정직, 견인, 창의성을 가훈으로 하여 자녀들을 엄격하게 교육했다. 그의 모친은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정숙온화하였으나 자녀교육에는 엄격하였다. 그러나 비교적 가정의 전체적 분위기는 행복스러운 가정이었다.
길선주는 네 살 때부터 가정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일곱살 되던해에 당시 이름 높은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서 한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특히 길선주는 사물에 대한 사고력이 뛰어났으며 정서가 풍부하였다. 그가 여덟살 되던해에 우연히 옛집을 지나다가 인생이 나그네 같음을 느끼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길선주는 열 한 살때 안주 성내 신설달 협씨의 열 여섯 살 되는 외동딸 선행(善行)양에게 장가들었다. 길선주의 가정은 의■식■주에 대한 예의범절과 규율, 상■하에 대한 예절, 남■여의 구별과 같은 것을 지키는 특유한 가풍이 있었고 이에 따른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는 열 세 살때에 안주 본부 초인직에 근무했었다. 그는 열 다섯 살까지 본부 초인직에 충실했고 1882년 12월에 초인직을 사면하고 열 여섯살에 노강 첨사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서 그곳 상서호(上西湖) 사숙(私塾)에서 장선생에게 한학을 계속 수학하였다.
그러나 당시 길선주는 자신의 부친이 기생첩을 두고 그로 인하여 어머니가 받는 고통을 목격하게 되었으며 또한 그 시대의 불공평한 관행과 사업의 실패, 부친과 떨어져 생활하는 두집살림, 깡패에게 맞아 약해진 그의 몸이 중병으로 거의 재기불능에까지 이르는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통한 시대적 혼란등을 경험하면서 그는 점차적으로 이 세상의 허무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었고 이러한 염세적인 사상은 그를 영적인 세계를 갈구하게 하는 동기를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길선주는 그것이 인간완성의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을 했으며 그 후로 그의 일생은 영원의 세계 탐구에 몰두하게 되었던 것이다. 길선주 그가 인생의 최대 시련기에 접어들었을 때에 그를 새로운 정신 세계로 이끈 사람은 그의 부인이었다.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로 병세를 회복한 길선주는 그 뒤로 자연히 종교에 귀의를 하게 되었다.
길선주는 그의 나이 열 아홉 살 되던해 여름에 처음으로 관성교(關聖敎: 삼국지의 관우를 높이는 종교) 에 심취하여 그 종교의 보고문(譜告文)을 만번이나 읽었다. 열 아홉 살때 관성교의 보고문을 만독함으로 그의 도행을 시작한 길선주는 관성교를 접한지 얼마되지 않아 이미 영적체험을 하게 되었으며 그것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보다 깊고 심원한 종교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하여 선도(仙道)의 종교쪽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그는 이 선도에서도 엄청난 정성을 기울였기에 이미 스물 세 살대 신차력(神借力), 수차력(水借力), 약차력(藥借力) 등에 통달하여 초인적인 힘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고 이제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심도깊은 수련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거스틴(Augustin)처럼  이러한 종교에서 참된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얻지 못했으며 마틴루터(Martin Luther)처럼 깊은 고뇌와 갈등 속에 있었다. 그가 25세 되던 해, 불도를 닦기 위해 평양 대성산 두타사와 평남 순천군에 있는 안국사를 찾아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3년을 지냈으나 아무 희망도 찾지 못하여 실망을 안은채 좌절했었고 또 그후 도교에 의지를 하면서 신선이 되기 위한 약초를 연구하기도 했지만 그의 건강만 악화되는 결과만 낳았다. 많은 종교와 도의 성취를 위한 그의 노력은 항상 허무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2. 기독교 입신에서 1907년 대부흥운동 전까지

바로 이때 그는 기독교와 첫 만남을 가지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당시 평양에는 1893년 이후 양귀자(洋鬼子)에 대한 소문이 퍼졌는데 그는 바로 예수교라는 이상한 종교를 전하는 북장로교 선교사 마펫(S. A. Moffett: 馬布三悅)에 대한 소문이었다. 새로운 종교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길선주는 마펫을 찾아가 기독교에 대한 교리와 예수의 복음에 대하여 담론을 벌이고 토론을 하였다. 이것이 길선주와 기독교의 첫 만남이었다. 그 뒤 길선주는 1893년 친구인 문홍준을 마펫과 한석진에게 소개하였고 또한 같이 도를 연마하던 김종섭을 소개하여 기독교에 대하여 알아보게 하였다. 그런데 오히여 김종섭이 기독교인이 되어 길선주를 전도하는 양상이 벌어지면서 길선주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한문으로 된 관주신약, 성경주석과 기타 기독교 서적들을 입수하여 읽게 되었다. 길선주는 이러한 서적들을 읽으면서 그가 지금까지 믿어 온 다른 종교들을 버리고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그는 「천로역정」이라는 작품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특히 김종섭의 끈질긴 전도와 설득으로 마침내 예수교가 참 도리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중생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스물 여덟 살인 1896년 가을이었다. 길선주는 개심하던 해에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영수직을 받고 33세 되는 해에 장로로 선출이 되었다. 이듬해인 1897년 8월 15일 길선주는 널다리골(판동) 교회에서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으로 입교하게 되었다. 이런 신비스러운 그의 종교체험은 그에게 강력한 소명의식을 심어주게 되었고 이것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종으로 평생 헌신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그의 신앙형태는 한국교회의 오늘날과 같은 신앙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98년 길선주는 널다리골 교회 영수에 피택이 되었으며 그의 부모가 세례를 받았고 사업도 성공했다. 그는 ‘예수학당’ 이라는 학교를 차리고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숭덕과 승형학교의 효시가 된다. 그는 학회장으로 10년 동안 교육사업의 전책임을 졌다. 그는 1903년에 자신의 약국사업을 정리하고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05년 박치록(朴致錄)장로와 함께 새벽기도회를 시작하면서 영적부흥의 기틀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7년에 평양 신학교를 제 1회로 졸업하였다.

   3. 1907년 대부흥운동 때부터 임종 때까지

1905년 을사조약이 있은 뒤에 1905년 영국 웨일즈 지방의 부흥운동 소식과 1906년 원산지역 부흥의 주역인 하디(R. A. Hardie)목사가 평양에서 가진 부흥회에 힘입어 1907년에 길선주는 대부흥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이때부터 그는 한국교회의 부흥사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부흥의 열기 속에서 장로회신학교는 1907년 6월 10일에 길선주를 포함한 제1회 졸업생을 7명 졸업시켰다. 그해 9월 17일 장대현 교회에서 길선주는 목사안수를 받고 그날로 교회의 청빙에 의하여 길선주는 장대현 교회의 위임목사가 되었다. 그 뒤로 그는 20년 동안 그곳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다. 1910년에 길선주 목사는 제 4회 노회에서 부회장에 당선되고 ‘백반구령운동’을 제안하며 실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05인 사건’으로 그는 맏아들 진형(鎭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으며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기도 했고 많은 목회활동 속에서 1920년 10월 출옥된 뒤에 1926년 박윤근과 그 일파들이 조직한 ‘유지회’에서 길선주 목사와 그 당회를 배척하는 교회의 분규를 당하기도 했다. 결국 길선주 목사는 그를 따르는 500여명의 성도들과 함께 이향리 교회를 창립하여 그곳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길선주 목사는 1935년 11월 25일 평서노회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에 마지막 설교를 마친 후 강대 위에서 졸도한 지 하루만인 26일에 하늘나라로 갔다. 결국 그는 1935년 11월 그는 생애를 마감했다.

    B. 시대적 배경

     1. 정치적 배경

19세기말 '조용한 아침의 나라' 라는 뜻을 지닌 조선의 정치적 상황은 안으로 수구 세력과 개혁 세력들간의 마찰과 밖으로는 밀려오는 서구 열강 세력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결코 조용한 땅은 아니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은 힘이 다스리는 냉엄한 국제 질서 속에서 비극적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일본의 득세로 인하여 야기된 한반도 안에서의 정치적 풍토는 좌절감과 절망감으로 온 백성을 내리 덮고 있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의 체결과 미국, 영국, 프랑스등 열강과 상대한 미숙한 외교적 수완으로 많은 잇권이 찬탈되었고 급기야 1895년 10월 8일에는 국모 민비가 일본 제국주의의 흉모에 의해 살해가 되는 끔찍한 일까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온 나라의 민심은 극도로 자극되었고 이것은 곧 바로 반일 감정으로 발전이 되었는데 이때의 분위기가 얼마나 비장하였는지 “왕후의 죽음을 누가 갚아주기만 한다면 내 머리카락을 단발하여 신을 꼬아 주겠노라!”고 한 고종황제의 탄식에서 잘 알 수 있다.  1905년 7월 27일 미 육군성 장관 테프트는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의 밀지를 받고 일본 수상 가츠라 다로와 소위 ‘가츠라-테프트 메모’ 라는 비밀협정에 조인을 하였으며 그 해에 11월 일본은 저 치욕의 을사늑약(乙巳勒約) 을 강압적으로 선포함과 동시에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1906년 2월 이등박문이 통감으로 와서 본격적으로 한국의 식민화를 구체화하고 있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그 해 일본은 정미(丁未)조약 을 체결하여 역시 강압적으로 한국의 군대와 경찰을 해산시키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를 시킨 뒤에 급기야 1910년에는 한일병탄을 이루고 말았으니 여기에서 조선 500년의 왕조는 종말을 고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길선주의 부흥운동의 정치적 배경은 이러한 일제의 강점과 그 좌절 속에 있었던 것이다.

     2. 사회적 배경

조선말의 사회는 한마디로 비운과 도탄의 시기였다. 열강의 침략속에 국력은 쇠잔하여지고 국민은 도탄에 허덕이고 있었다. 60년동안 계속되어 온 외척의 세도정치로 온갖 뇌물과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탐관오리가 기승을 부렸으며 정부는 당파싸움의 일색이었다. 따라서 국민들의 사회생활은 원시의 기본적 생존권을 유지 할 수 있는 단계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참하기 짝이 없었으며, 그나마 의식주 문제도 해결 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보니 국민의 원한과 저주가 뼈속에 사무치게 되었고 곳곳에서는 도적떼가 횡횡했고 반항의 무리들이 우후죽순으로 일어나 사회질서는 그야말로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극히 혼란해졌다. 시대에 대한 꿈과 희망을 상실한 청년들은 사회를 이탈하는 경향이 생겼고 뜻있는 인물들은 현실도피적인 성향을 띠었으며 은둔생활은 사람들이 흠모하는 최고의 생의 철학이되었고 마침내 도피성향의 양식은 사회적인 병폐로 생리화 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아편과 술, 담배는 심각한 사회 질서 문란의 요소가 되었는데 1901년 4월 4일자 「그리스도 신문」에서는 강한 어조로 아편에 대한 경고를 싣고 있다.
   
대저 아편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비상보다 더 독한 것이라 이것으로 집안이 패하고 몸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것이니 사람이 가까이 할 것이 아니다. 중독된 후에는 사람도 버린 몸이 되려니와 자연히 이로 인하여 집안 재산을 다 탕진하고 필경은 적신만 남는데 한․미 해전에 청국에서 아편독에 죽은 백성이 매년 팔십만명이더라 하니 장차 이러하고 보면 몇해 안에 나라 백성의 씨가 없어지겠는가 슬프도다.
   
이런 혼란 가운데서 사회의 변화는 개화 물결과 함께 봉건적 지배 질서를 붕괴시키고 양반 지배 체제의 뿌리가 흔들리게 되는 사회현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 그리고 국민의 피페와 도탄 가운데서도 교회는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3. 기독교적 배경

이러한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정치, 사회적 배경 속에서 교회가 직면한 위기와 기회는 독특한 것이었다.
   
일본의 침노로 인하여 야기된 정치적 풍토가 한국민에게 좌절과 절망감으로 내리덮고 있을 때 그 어떤 모양으로라도 돌파구를 찾아 헤메이는 기독교인을 향해 선교사들은 정치 문제와의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려고 제동을 걸었다. 여기에서 애국적인 기독교인들과 선교사와의 사이에는 갑정적 대립이 없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안팎의 시련 속에서 한국교회는 새로운 신앙 형태를 확립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사경회와 같은 열정적인 성서연구와 그것을 통해 얻은 인간 존옴에 대한 자각, 자립교회의 정신에서 배양된 책임있는 인간성의 형성, 자립선교의 실천에서 오는 고백적 공동체의 강한 의식, 선교사들의 연대활동 등, 이와같은 일련의 기독교적 배경에 따른 현상들은 한국에서의 유기적인 기관의 성질로나 거기 깔려 있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불길 때문에 좌절 속에 방황하는 한국이 찾아갈 유일한 보루로 보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적 배경에는 민족교회와 선교사의 교회, 애국적인 기독자와 선교사 주변의 기독자들 사이의 감정은 여기저기 폭발하는 예민한 반응을 동반했고 마침내 민족 반역자의 대열을 교회에서 정비하자는 치닫는 호소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이와같은 안팎의 시련 속에서 한국교회의 기독교적 상황은 그 올바른 신앙의 형태를 확립하기 위한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몸부림을 태동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본 바와 마찬가지로 왕실의 비운이 접근되면서 의외로 정치의 회호리 속에 끌려갔다고 자성한 선교사들의 뇌리 속에 본래적인 신앙 형태로의 복귀가 숙제로 남아 있다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그렇게 해서 한국교회를 대 부흥의 소용돌이로 끌고 간 것이 1907년의 대 부흥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교회적 상황의 배경에서 유일한 해결책은 오로지 성령의 세례밖에는 이 어려움을 돌파할 길이 없다는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염원과 소망이 사경회와 기도회를 통한 1907년의 대부흥회에 직결되게 된 것이다.

    C. 부흥운동의 특징

한국교회의 경이적 부흥에 있어 그 원동력은 길선주 목사 부흥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열성적으로 성행된 기도회와 말씀중심의 사경회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또한 길선주 목사 특유의 종말론 강해를 통한 신앙의 고취를 들 수 있다.
길선주 목사가 신학생으로서의 5년동안 외적으로는 교회의 조직을 정리하고 내적으로는 성령의 역사를 대기하는 준비기간이었다. 1906년 박치록 장로와 함께 시작한 새벽기도는 자연적으로 부흥회의 양상을 지니게 되었고 밤마다의 성경공부 중심의 사경회는 참석자가 날로 증가하여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결국 이 두 집회가 실질적으로 부흥집회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항상 행하였던 종말론 강해는 교인들의 신앙성숙에 큰 몫을 하였다. 이 말씀중심의 사경회와 기도회가 실질적인 부흥집회의 원동력이었으며 그의 독특한 종말론 강해가 길선주 목사 부흥집회의 큰 세가지 특징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1. 사경회를 통한 말씀중심의 부흥운동 

길선주 목사가 행한 말씀중심의 부흥회의 특징은 사경회 중심의 움직임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길선주 목사의 말씀중심의 사경회에는 몇가지 특성이 있었다.

     1) 폭넓고 다양한 말씀선포와 강의    
 
설교되어지고 강의되어지는 주된 과정은 예수의 생애, 바울서신, 주기도문, 십계명, 사도신경 등 신앙의 핵심이 되는 내용들이 그 주 내용을 이루었으며 기독교 교육에 대한 내용과 전도와 기독교 상담, 회의법 등 일상생활에 유용한 내용들도 많았다. 일반상식의 과정에서는 천문, 지리, 농사법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특히 여자들을 중심으로한 사경회에서는 아동교육, 육아법, 건강위생, 신생활 운동에 관한 시간도 나름대로 할당이 되어 있었다.
길선주 목사가 사경회에서 행하였던 설교의 특징은 우선 그는 철저하게 모든 인간은 죄인임을 강조하고 회개할 것을 외친다는 것이다.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 교회 설교에서 인간이 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죄는 다 고백하게 하였고 오직 “주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라고 부르짖을 뿐이었다■■당시 길선주는 능력과 성령충만한 설교로써 부흥의 불길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그날밤 길선주 목사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이 가득찬 얼굴이었고 순결과 성령으로 불붙은 얼굴이었다■■그는 마치 옛날 광야에서 죄의 회개를 부르짖은 세례요한과도 같았다. 그래서 통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길선주 목사의 말씀중심의 사경회에서는 회개를 촉구하는 다양하고도 폭넓은 설교와 강의가 그 주를 이루고 있었다.

     2) 체계적인 사경회(査經會) 운영

사경회의 운영을 위한 방법에 있어서는 새벽기도회 부터 시작하여 오전에는 성경공부, 오후에는 일반상식을 공부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개인전도방법을 익히고 흩어져 나아가 축호전도와 노방전도를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돌아온 후 저녁에는 말씀중심의 사경회를 주로 개최 하였다.
그 당시 교인들의 생업에 지장이 되지 않도록 사경회의 개최기간은 대개 농한기가 주로 이용되었으며 원거리의 사람들은 자취도구를 나름대로 준비하여 합숙을 하게 하기도 하였고 친척의 가정에 머무르게 하기도 하였다. 또한 길선주 목사의 사경회 설교로서 그는 각 교회와 지방을 순회하면서 부흥회와 사경회를 연차적으로 인도할 때 매일 새벽기도와 오전 사경 강의와 저녁 집회설교를 중복되지 않도록 하였고 그의 열심있는 기도와 특히 능력있고 힘있는 설교로 좌절과 고통 속에 있는 우리 백성들과 교인들에게 하늘나라의 소망을 심어 주었다.

    2. 기도회를 통한 성령충만 중심의 부흥운동

     1) 새벽기도회 창시
 
바운즈(E. M. Bounds)는 “기도란 하나님의 현존을 나의 현존으로 인식하여 그 분에게 나의 모든 필요를 요구하고 그 요구가 충족이 되면 충족된 것을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의 사업을 위하여 투자하는 하나님 자녀들의 열망이다.”라고 기도를 정의했다. 기도는 기독교의 중심적인 신앙의 표현인데 길선주 목사는 더욱더 특이한 기도의 전통을 우리들에게 남겨 주었다.
길선주 목사가 행한 기도회 중심의 부흥운동을 말할 때에 빠질 수 없는 것이 그가 시작한 새벽기도회이다. 1906년 부터 박치록 장로와 함께 길선주 목사가 장대현 교회와 산정현 교회에서 행한 새벽기도회는 어느덧 한국교회의 행사처럼 영속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길선주 목사가 장대현 교회에서 행한 특별 새벽기도회는 매일 4 시 반에 기도하기 시작하였는데 얼마 후에는 400명의 많은 수가 모인날 도 있었다.
이렇게 길선주 목사가 새벽기도회를 통한 부흥의 기틀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을 우리는 그의 신앙형성과정에서 잘 살펴 볼 수 있다.
길선주의 신학형성은 둘째는 기도였다. 그의 기도는 그의 일생을 통하여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가 주의 음성을 들은 것도 기도중에서였고, 기도는 그의 생활의 가장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그가 한국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인 새벽기도회를 창시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중에 하나이다. 기도를 통하여 항상 힘을 얻었고 기도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였다. 따라서 그는 목회자로서, 또는 사경회 인도자로서 기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더 강조하고 자신이 또 그렇게 실천을 하며 살아왔다.
또한 길선주 목사가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기 이전에 선도에 심취하였던 것이 새벽기도회의 창시를 비롯한 그의 기도 생활에 전반적인 영향을 주었다.
길선주는 기독교에 입문하기 전에 9년 동안 선도 수련에 전념하여 겸한 고행적인 기도생활에 전념하였다. 심산유곡을 찾아다니면서 21일, 49일, 100일에 걸쳐 불면불휴의 기도에 전념하였으며■■잠을 쫓기 위해 엄동설한 얼음물로 목욕하고, 밀심지에 불을 붙여 손가락 끝을 지져가며 기도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기도는 주로 참선과 유사한 묵상기도였다. 심월관의 심공에 깊이 들어가 망아망형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였다■■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성신이 자기 안에 늘 충만 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아침 5시 또는 밤 10시로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였다. 매일 한시간 이상의 보통기도와 매주 사흘씩의 금식기도와 매년 1주일간의 금식 대기도를 세상 떠날 때까지 계속하였다.
이와같이 길선주가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서 시작한 새벽기도회는 세계 교회사상 한국이 처음 실현하여 그 전형이 되게 하였고 그것은 길선주 목사의 부흥운동의 특징을 결정짖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2) 성령의 임재를 통한 회개를 촉구하는 기도회

새벽기도회 이외에도 통성기도라고 해서 교인들이 예배도중에 함께 소리를내면서 기도하는 의식도 길선주 목사의 창안이었으며 성령의 임재에 대한 체험적 고백이나 그 정서적 표현이 경건하게 감싸는 신앙생활의 모두도 길선주 목사의 부흥회 특징 중의 하나이다.
1906년 즉 이길함 선교사와 함께 평양시내 부흥회를 인도할 때에 길선주 목사는 “마음에 문을 열고 성신을 영접하라!” 는 설교를 하자 교인들이 감동을 받아 통성기도와 아멘하는 소리 등으로 장내가 뒤흔들렸다. 길선주 목사의 1922년 일기책을 보면 친필로 1907년의 정월(正月) 사경회에서 성신이 강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907년의 정월 부흥사경회는 앞으로 한국교회에 있을 대부흥의 전야제로 길선주의 ‘성신영접’ 즉 회심과 회개의 강조로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길선주 목사는 회개의 고백과 통회하며 자복하는 형식의 기도회를 진행했었다. 이후 한국교회는 온통 죄를 회개하는 울음투성이로 변했다.
사람에 이어 또 사람이 일어서서 죄를 자복하고 넘어져서는 죄 의식에 고민하면서 땅을 쳤다. 어떤 때는 죄 자복이 있은 후 온 청중이 통성기도를 하면서 그 통성기도의 결과는 무엇이라고 형언하기 어려웠다. 다시 또 죄를 자복하고 또 자복하고 나서는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렇게 기도회는 새벽 2시까지 자백과 울음과 기도로 계속 되었다.
이처럼 길선주 목사의 부흥회가 가지는 기도회는 성령의 임재를 통한 강한 회개와 자복을 촉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3. 말세론 강해를 통한 신앙의 고취

일반적으로 길선주 목사는 성경을 많이 읽고 또 암기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요한 계시록을 많이 읽고 연구하였으며 강론을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구약성경을 삼백독 하였고 신약성경은 일천독이 넘었으며 특히 요한 계시록은 일만독을 하였다. 그가 3.1 운동의 33인으로 서명자 중의 하나로 체포가 되어 석방될 때까지 2년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완성한 그의 말세학(末世學) 또는 종말론(宗末論)은 그의 독특한 말세신학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말세학 강해는 성경을 중심으로 전파되었는데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는 것에 총력을 기울였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인은 신앙을 좀먹고 나라를 좀먹는 게으름을 우리생활에서 쫒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그의 저서 「해타론」(懈惰論)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이 저서는 후에 「만사성취」(萬事成就)라는 다른 제목으로 출판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길선주의 말세학은 현 질서에 대한 부정적인 자세이지만 묵시록적 천년완국을 저 앞에 있는 발전된 인류의 아름다운 낙원으로 보는데서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또 지상천국의 요소가 강헀다. 그래서 그것은 당연히 자연과 인간과의 속량적인 관계를 다짐케 하였다. 그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지상적 실현을 선뜻 믿었다.
일반적으로 다른 종말론에서는 예수의 재림으로 끝나는 이 세상의 역사는 전통적으로 불바다가 되어 완전히 없어지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하여 길선주 목사는 하나님이 창조한 이 우주는 결코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말세학」제 12장 변화 '세계 무궁편' 에서 우리는 이 지구를 사랑해야 한다고 피력하였다. 길선주 목사의 종말론 근저에는 전 천년설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우리 한국교회의 신앙노선이 그의 말세론에 기초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이러한 길선주 목사의 말세론 강해의 근저에는 가난과 무지와 일제의 정치적 억압에 짖눌려 삶의 열정과 미래에 대한 소망을 상실한 민중들에게 내적 영적 투쟁을 자극하고 삶의 열정을 불러 일으킨 것과 불의한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강조함으로써 궁극적인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제시했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 될 수 있으며 불의한 일제와의 투쟁보다도 불의한 일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신자 개인의 영적 투쟁을 강조한 면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D. 부흥운동의 평가

    1. 긍정적 평가

길선주 목사의 부흥운동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진정한 기독교의 진리를 터득하게 하였으며 서양의 익숙치 못한 종교로만 인식이 되었던 기독교 진리가 한국 기독교인들 마음에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길선주 목사의 부흥운동의 결과는 실질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기독교를 믿으며 그 신앙을 유지하던 사람들이 그대로 방치하고 있던 산당과 사당들을 헐어버리는 사례가 번번히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길선주 목사의 부흥운동은 이때까지 외국의 종교로 인식이 되었던 기독교가 한국에서의 그 발전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둘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의 급격한 양적, 질적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선주의 부흥운동은 신앙생활에 있어 일대의 혁신을 가지고 왔다는 점이다. 성경공부의 중요성과 새벽기도와 회개기도를 통한 올바른 신앙생활로의 지표를 제시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길선주 목사의 부흥운동은 에큐메니컬 정신의 구현이었다.  선교사들과 한국인 신자들 사이에 서로의 이해가 잘 되지않을 이유들이 많았다. 민족성, 풍속, 습관, 사고방식과 감정의 차이는 상호이해의 길을 막는 벽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대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 사이에서의 갈등이 해소되었고 형제의식이 굳어지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러한 에큐메니컬 정신은 교파를 초월하여 장. 감 연합으로 서로 강단을 교류하는 결과도 있었던 것이다.

    2. 부정적 평가

위에서 살펴 본 긍정적인 측면 외에도 길선주의 부흥운동은 한국교회를 하여금 비정치화로 이끌기 위한 작전이었으며 한국을 몰역사화 시키기 위한 계략이었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부정적 평가자로는 민경배, 이장식, 노치준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선교사들이 이 부흥운동을 지도하고 결실하게 한 원리와 목표가 한국교회의 비정치화 그것이었다는 것이다. 즉 선교사들은 1905년 을사늑약이 선포되고 한국이 점점 일제의 식민지화가 되어 가면서 이에 격분한 일반 백성들과 교인들 사이에 반일적인 태도가 구체화되어 가고 무력항쟁의 소지가 높아간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정치적인 사건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오로지 영적인 면에만 치중을 하도록 하여 예수 믿고 천당가는 것에만 몰두하게 하였다는 평가이다. 그러므로 교인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것들, 특히 정치적인 면에는 일체 간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부흥운동을 주도했고, 그 결과 이 부흥운동이 끝나고 나서부터는 한국교회의 항일정신이 희박해졌으며 교인들은 오로지 내적 신앙에만 치중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나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가 정치문제에 관련을 맺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 생각하고 교회는 할 수 있는데로 정치문제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게 하려고 힘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부정적 견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며 변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김인수 교수는 이들의 부정적 해석에 반대하는 주장을 그의 저서를 통하여 설득력있게 하고 있다. 1907년 부흥운동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해석은 부흥운동을 주장하는 성령의 역사를 왜곡시키고 무시하게 할 위험성이 있으며 동시에 부흥운동의 본원을 잘못 이해한 데서 오는 곡해인 것이다. 부흥운동의 주역은 성령이며 오직 성령만이 그 부흥운동을 주도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비정치화의 문제도 ‘교회와 국가’ 의 문제라는 커다란 명제에서 보아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기 위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얼마나 처절한 투쟁을 벌였는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데서 나온 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교회는 정치화할 수 있는 집단과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1907년의 부흥운동이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진행되었던 부흥운동임을 인식해야겠다.
 
  

 

   

 

 

 


   
    Ⅲ.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

    A. 생애요약

    1. 출생부터 기독교 입신 전까지
 
김익두(金益斗)목사는 1874년(고종 11년) 11월 3일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에서 농부인 부친 김응선(金應善), 모친 전익선(田益善)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큰 꿈을 품고 열심히 공부하여 열 여섯살에 과거를 보려고 서울에 올라가 응시했으나 뼈아픈 낙방을 맛보았다. 매관매직이 심했던 그 당시의 세태로 미루어 돈없고 빽 없이 과거 급제란 꿈에도 그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김익두는 공부를 포기하고 귀향하여 김익진(金益眞)이라는 여자와 결혼하고 그의 나이 열 일곱살 되던 해에 상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부친을 여의고 나서 그 사업마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망하게 되자 그는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루하루를 술을 마시며 놀음을 하고 주변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깡패의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악명 높은 불량아로서 안악군 일대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정도였다. 누구나 그에게 대항하였다가는 모조리 때려 눕히는 완력가인지라 그를 아는 사람들은 시장에 가는 도중에 서낭당 앞을 지나게 되면 오늘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안악시장에서 그가 술을 외상으로 마시고 냉면을 외상으로 먹고 갚지 않은 것은 예사였으며 그렇다고 해서 잘못 건들였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런지 모르기 때문에 한마디도 그에게는 독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인생에 대한 궁극적인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즉 “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인간은 무엇때문에 사는가?”, “어째서 인간은 죽어야만 하는가?” 하는 등의 의문이 잇달아 일어난 것이다.
어느날 여선교사가 그에게 전도지를 주며 예수를 믿기를 권고 하였다. 그는 전도지를 받아 쥐자 그 자리에서 코를 풀고 그 종이를 돌려주며 그 선교사를 희롱하였다. 그러니까 그 여선교사가 “청년 그렇게 하면 코가 썩지요.” 라고 공손히 한 말은 그에게 간접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인상적으로 심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평생을 주님께 헌신하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 

    2. 기독교 입신부터 기독교도 연맹 가입 전까지
    
앞서 본대로 불량아요, 안악산골의 깡패로 악명을 떨치던 김익두가 자신의 생애를 바꾸어 주실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것은 1900년, 그의 나이 스물 일곱 살 되던 때였다.
김익두는 어느 날 소안련(W. Swallen)선교사가 인도하는 부흥집회에 몰래 참석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영생에 대한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사람이란 죄 지은대로 보응을 받는다. 죄인은 지옥으로 가지만 의인은 천국으로 간다.” 는 설교말씀에 김익두의 가슴이 뜨끔하였으며 그 날의 모든 말씀들이 김익두의 영혼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 그는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그 뒤부터 그는 과거의 모든 악행을 버리고 모든 행동과 말투가 바뀌게 되었다. 김익두는 이 경험 이후 세례를 받을 때까지 10개월 동안 성경을 일백독을 할 정도로 경건생활에 충실했으며 모든 언행을 삼가 조심하였다.
아래의 일화는 그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김익두가 예수를 믿게된 다음 그 어느 날 냉면 집에서 일하는 아이가 보기도 싫고 밉기도 하여 뚜물 찌꺼기를 그가 지나가는 옆에 확 뿌렸다. 주인은 그 광경을 보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지고 그 애를 몹시 책망하였다. 김익두는 말 한마디 없이 그냥 지나갔다. 주인은 말하기를 “오늘은 그가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냥 지나간 모양이나 다음 장날에는 우리 집은 망하게 되었다” 라고 하면서 크게 걱정을 하였다. 다음 장날이 되어 김익두가 그집 앞을 또 지나가면서 하는 말이 “예수 믿으시오!” 라고 전도하였다. “나는 옛날의 김익두가 아니고 새 김익두이올시다.” “당신에게 지은 외상 값은 후에 다 갚아 드리겠오” 라고 하자 주인은 무슨 영문인니 몰랐지만 크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놓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가 세례 준비를 하면서 성경을 읽고 있을 때였다. 친구가 찾아왔다. 그때 이러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 사람아, 이 방구석에서 이 무슨 청승인가. 답답한지 않은가? 주막에 가서 대포나 한잔 하지, 어서 일어나! 하, 내가 요새 약을 복용중이라 말야, 술을 못 먹거든. 무슨 약인데?, 응, 지금 구약과 신약을 먹고 있거든, 술은 절대 금물이라는 처방이라서.
   
이러한 변화를 보이며 세례를 준비했던 김익두는 1901년 1월인 그의 나이 27세에 소안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후에 그는 약종상을 경영하며 1년에 1,000원 가량의 수익을 올렸으나 재령읍 교회가 그를 전도사로 초빙하자 번창하던 약종상을 그만두고 월 4원의 사례비를 받는 교역자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소안련(W. Swallen)목사의 부탁을 받아 신천에 전직했는데 이때부터 김익두의 신천, 신천의 김익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신천에서 갖은 핍박을 받았다. 당시에 신천은 개척지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익두가 양귀신(洋鬼神)을 섬기게 한다는 이유로 그를 발길로 차고, 돌팔매질을 하고, 욕설과 조롱을 하였다. 결국 애만 쓰고 열매를 얻지 못하자 전도의 어려움을 알고 입산 금식기도를 하면서 최소한 3명의 성도를 허락하기를 기도드리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3명의 신도를 얻게 되었으며 얼마 후에 30명으로 늘어나 이들이 신천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그리고 김익두 목사는 죽는 날까지 그곳에서 목회하였다.
김익두는 1906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에 제 3회 졸업생으로 졸업을 하고 목회활동을 시작하던 중 한번은 심방갔다 오다가 마을 공동 우물 처마 밑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보고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고 외쳤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김익두 목사는 자신의 기도가 부족하다고 믿고 더욱 기도와 신앙생활에 힘써 하나님으로부터 마침내 병고침의 신유은사를 받게 되었다.그 후로 김익두 목사는 이 신유은사를 통하여 부흥집회를 전국을 무대로 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눙력과 기적에 대한 소문이 꼬리를 물자 그의 집회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여 그를 시기하고 중상하는 무리들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그의 이적치유 집회에 대하여 비판적인 평가를 내리는 무리들이 속출하기도 하였다. 1943년에는 김익두 목사가 일본경찰의 강요에 의하여 신사참배문제로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도중에 연행이 되어 일본 신사 앞에 강제로 세워지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사진으로 남겨 “김익두 목사가 신사에 절을 하였다!” 라고 신문에 선전이 된 것이다. 결국 김익두 목사는 강단에서 끌어 내려져 황해도 은율군에 있는 어느 과수원으로 보내져 제한된 주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5년 조국광복이 이루어져 다시금 신천 서부교회로 돌아오는 그날까지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3. 기독교도 연맹 가입부터 임종 때까지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광복이 있은 이후에 김익두 목사는 그리운 신천교회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다른 어려움이 그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3.8선이 막히자 북한에서는 공산치하에서 교회가 탄압을 받기 시작하고 시험에 들기 시작하였다. 1947년 9월 소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이 탄생된 후 공산당은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또 종교지도자들을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소위 ‘기독교도연맹’(朝鮮基督敎聯盟)이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이는 물론 공산당의 어용단체이며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려는 교회를 탄압하기 위한 조작기구였다. 이때 강양욱(康良旭)이라는 목사는 중국 산뚱 선교사로 다년간 활약한 박상순을 포섭하여 그에게 기독교도연맹의 위원장이라는 직책을 맡기고 이때에 원로목사 김익두 목사를 섭외하여 기독교도연맹 총회의 초대회장으로 추대하였다. 결국 김익두 목사는 그의 제자 강양욱의 농간에 넘어가 김일성 괴뢰정권에 협력하는 듯한 오해를 받게 될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물론 김익두 목사의 의도는 기독교연맹에 가입하여 괴뢰정권에 협력하는체 해서라도 교회를 지키고 복음을 사수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우리는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해서라도 교회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였다. 심지어 김익두 목사는 김일성과 만난 자리에서 “자네는 언제 예수를 잘 믿을라나?” 하며 전도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김익두 목사가 기독교도연맹의 초대회장이 되어 그 직책을 수용한 것이 꼭 부정적인 면에서의 친공산주의적 행적이라고 치부하게에는 너무 지나친 면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주장할 수 있겠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때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김익두 목사는 대성통곡을 하고 “내 어찌 편히 잠자리에 들겠느냐?” 하면서 교회로 들어가 그때부터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한다. 10월 14일 김익두 목사는 신천 서부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때 총기를 가진 공산군들이 교회당 안으로 난입해 들어왔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총을 난사하였으며 그리고 김익두 목사를 비롯한 5명의 교인을 살해하였고 또한 김익두 목사는 그가 순교 하는 순간까지도 공산당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한국교회가 낳은 최대의 부흥사이며 이적을 행하던 순교자 김익두 목사는 이러한 모양으로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B. 시대적 배경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은 1910년대에 시작이 되었지만 그의 부흥운동이 한국교회사에 큰 자취를 남기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그러므로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에 대한 시대적 배경은 1920년대에서 부터 30년대에 이르는 어간으로 잡아야 할 것이다.

    1. 사회적 배경

1920년에서 1930년 사이에서 보인 우리민족의 사회적 배경은 한마디로 끝없고 끈질긴 민족독립운동과 그것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인한 좌절과 실패 속에서 패배의식을 느끼는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3.1운동의 실패로 독립은 멀어져 가고 상해에 생겨난 임시정부는 당파싸움으로 시종하고 있었으며 교세는 저하되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책으로 돌아선 일제는 신문과 잡지를 일시적으로 발행하게 하고 이로 인한 신문화와 과학지식의 증대는 청년들로 하여금 회의에 빠지게 하였고 교회의 영적 기반은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에는 반일감정을 가지고서 행하는 반일시위가 많았으며 강한 독립운동을 보인 시기였다. 특히 3.1운동의 실패와 그로 인하여 일어나는 일제의 강압과 민족의 아픔은 실로 컸다.
1920년대의 사회적 상황은 학생들의 운동이 활발한 시기였다.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학생들의 단결과 조직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들이 많이 조직이 되어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시기였던 것이다.
1926년 6월 10일에 조선왕조 최후의 왕인 순종의 국장일을 기일로하여 계획하였던 반일시위는 사전에 발각이 되어 210여명의 학생들이 현장에서 검거가 되고 그 가운데 75명이 송치되었으며, 주동자로 11명이 기소 되었다. 이것은 곧 다시 6.10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6.10 만세 운동은 1928년 수원고농(서울농대 전신)학생이었던 우종휘, 남영희 등 10여명에 의하여 3차에 걸쳐 상록수 운동과 함께 거세게 일어났다. 이같은 학생들의 운동은 1929년 광주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국학생운동이었다. 1929년 10월 나주에서 한국 여학생을 희롱하는 일본 남학생을 목격한 한국 남학생들의 격분이 그 동기였다. 이러한 학생들의 반일시위운동은 전국으로 확산이 되었으며 1930년까지 지속이 되었다.
한마디로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가 성행하던 시기의 사회는 반일감정에 의한 시위와 운동, 그리고 실패와 좌절, 분노 등으로 점철되던 시기였던 것이다. 

   2. 기독교적 배경

3.1 독립만세운동 이후의 교회는 그 이전보다 겉으로는 약간의 자유가 보장된것같이 보였다. 3.1 운동 이후 일제의 정책은 일단 표면적으로나마 문화정책을 표방하여 교육정책 및 선교사, 기독교정책에 있어서도 유화적 자세를 보였다.
이를 이미 눈치챈 선교사들은 3.1 운동 직후인 1919년 9월 20일 서울에서 정기적인 연차대회를 열고 한국주재 선교사들의 연합단체인 선교사연합공의회의 이름으로 새로 부임한 조선총독에게 정교(政敎) 분리의 원칙하에서 종교적 자유, 도덕적 향상 및 선교활동의 자애를 제거해 달라는 취지하에 연합선교건의서를 제출하여 기독교의 전도활동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일제의 집요한 교회의 억압은 눈에 보이지 않게 꾸준히 지속이 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얻지 못한 좌절감과 가족과 교우와 이웃을 잃은 슬픔 속에 잠겨 있을 때 교회는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앞으로 더욱 거세게 불어 올 일제의 교회 탄압에 대하여 신앙적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고난에 처한 한국교회 신자들과 백성들은 그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으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직접 목격하고 또한 체험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교회는 그것을 실현해 나가야 했다. 그래서 많은 부흥사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김익두 목사는 바로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쓰신 도구였다.

   C. 부흥운동의 특징
   
김익두 목사 부흥운동의 특징은 그가 받은 신유은사를 통한 치유중심의 부흥집회와 그리고 1920년대의 혼란하고도 어려운 사회현실 속에서 고통받고 억압받던 빈농층과 병자들과 같은 서민층을 중심으로한 대규모 형태의 집회라고 특징지어 말할 수 있겠다. 

    1. 신유(神癒)은사를 통한 병고침 중심의 부흥운동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의 기본적인 성격이 신유부흥회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 김익두 목사의 일생을 음미하는 가운데 그가 신유의 은사를 받게 된 경위와 그 상황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김익두 목사가 신유은사를 받기 위해 무척 하나님께 간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19년 10월 강동(江東)에서 사경회를 인도하였는데 그 때 같이 사경회를 인도하던 순천교회 정석종 목사와 이적, 기사에 대해 대화 하던 중 김목사의 마음은 뜨거워졌고 “하나님의 권능은 변함이 없으시니 오늘에라도 주께서 신유의 은총을 주시면 어찌 사도때와 같이 이적이 나타나지 아니하리요, 현대에 이적이 나타나지 아니함은 기도하지 아니한 때문이요, 기도하지 아니함은 믿음이 부족한 때문이다.” 라고 생각하고 즉시 신유의 권능을 간구하기 시작하였다. 1개월만에 신천읍 본교회에 돌아와 중병 중에 고통하는 여신도에게 안수하니 그 신도는 다음날 곧 치유함을 받았다. 이로써 김목사는 이적에 대한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김익두 목사는 신유의 은사를 갈망하는 가운데 드디어 김익두 목사는 신유의 기적을 나타내었는데 김익두 목사의 신유은사가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1919년 12월의 현풍교회 부흥회에서였다.
1919년 12월에 김목사가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玄風)교회에 사경회를 인도하기 위해 갔다. 수백명의 교인들이 참석한 중에 병자 한 사람이 끼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박수진(朴守眞)이었다. 그 병자는 10년전에 아래 턱이 떨어져 갖은 방법으로 치료해 보았으나 효력이 없으므로 이제는 거지가 되어 세상에서는 아무 소망을 찾지 못하여 예수나 믿겠다는 생각으로 교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김목사는 그 불쌍한 정경을 보고 너무나 가련하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김목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금식 기도하였다. 이것이 삼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 병자의 아랫턱이 완전히 붙었다.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감사하기 위하여 이름을 박수은(朴受恩)이라고 고쳤다.
김익두 목사의 이러한 신유은사를 통한 강한 치유의 기적을 중심으로한 부흥회의 소식은 계속 되었으며 그것에 발맞추어 김익두 목사의 신유의 기적도 계속 일어났다.
1920년 9월에 경상남도 부산진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김낙언의 아들 김두수(金斗秀)가 출생한지 8개월만에 앉은뱅이가 되어 8년을 지내 오다가 김익두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한다는 소문을 듣고 아버지와 함께 집회에 참석했다. 그는 강대 바로 밑까지 기어나가 앉았다. 이를 본 김목사의 마음에 불쌍한 마음이 일어나 안수 기도하고 손을 잡아 일으키니 즉시 걷게되어 온 교회가 다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와같은 기적은 수 없이 많이 일어났다. 4년 된 다리 병이 완쾌되는가 하면, 18년 된 혈루증이 깨끗이 났고 소경이 눈뜨고 곱사등이 펴지고 이러한 이적의 소문은 널리 펴져 그가 집회를 열기만 하면 각처에서 수 백명씩 병자들이 몰려 들었다.
이와같은 계속적인 신유은사의 출현과 병자들의 치유는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를 당연히 신유은사를 통한 병자치유의 부흥회로 특징지을 수 있게 하는 증거이다. 이처럼 김익두 목사는 그의 부흥집회를 통하여 불같은 성령의 임재, 기적의 신유를 가져오는 부흥회를 주도했던 것이다.

    2. 소외계층을 중심으로한 대규모적 부흥운동

김익두 목사의 부흥집회에서 보여지는 또다른 특징은 소외계층을 중심으로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와 소망을 주는 형태의 부흥집회였다는 점이다. 고난에 처한 한국교회 신자들과 백성들은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는데 이들의 소망을 현실로 이끈 인물이 김익두였으며 그러한 것은 김익두 목사가 이끄는 부흥회의 특징이 되고 있다.
김익두의 부흥운동은 어떠한 성격의 것이었는가? 김익두의 부흥사경회는 대형집회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가 인도하는 부흥성회는 어디에서나 전례없는 인파에 휘싸이곤 하였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1920̴1930년대의 부흥운동은 ‘고난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와 권고’ 의 성격을 띤 것이었고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그러한 위로와 권고에 대한 희구태(希求態)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운동의 형태로 풀어낸 것이다. 김익두의 부흥사경회는 대체로 새벽기도회, 오전 두세 시간에 걸쳐 성경공부, 낮 시간의 요리(要理)공부, 그리고 저녁 시간의 강설회(講設會)등으로 구성되었다. 이와같은 일정은 부흥회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실상 거의 온종일을 집회에 매달리게끔 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다시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진정으로 절박한 것이었다.
이렇게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소외된 계층이 많이 몰리게 된 것은 시대적 상황과 또한 그가 보이는 신유은사를 통한 기적의 대상이 빈서층(貧庶層)이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김익두 목사의 설교는 가난하고 병마에 시달리는 소외계층 사이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는 겸손, 양보, 가난, 소박함을 찬양하고 부(富)에 대한 경원, 현질서의 종말과 심판을 피력했다. 그리고 그가 사용한 언어의 소박성이 이들 소외계층의 영혼을 파고든 것이다. 그의 천년 왕국적 종말론은 소외층에게 환영을 받았고 그의 부흥회를 통하여 성도들은 사람의 영혼속에 내재하는 성령의 도움으로 한 인간의 존엄성을 약속받을 수 있었으며 동시에 기존 사회 신분제도의 저항의식을 신앙으로 지탱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대규모적인 연합집회도 그 특징을 이루는데 가령 1920년 6월 31일의 평양집회가 그러하였다.
그때 평양시의 7교회가 연합을하여 대부흥회를 개최하였는데 당시 「동아일보」에 의하면 6천여명의 인파가 운집한 대성황이었다■■그가 총회장으로 피선되고 나서(1920년) 그해 10월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가진 서울시 7교회의 연합부흥회도 1만여명이 참석하는 대성황으로 추운날씨에도 마당에 자리를 깔고 부흥회를 계속한 한국교회사 초유의 단일 부흥회였다.
이와같은 인용문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김익두 목사가 행한 부흥집회의 또다른 특징으로는 그 당시 실의와 좌절에 빠져있는 소외받은 백성들과 빈서층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용기를 전해주는 대규모적 부흥집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김익두 목사가 행하던 부흥집회의 특징은 신유은사를 통한 이적치유의 대규모적 연합집회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현실화 시켜주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D. 부흥운동의 평가

    1. 긍정적 평가

일제의 억압 속에서 암울한 시절을 보내고 있던 대중들에게 김익두 목사는 그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고, 3.1 독립운동 후에 희망을 잃은 민중들에게 삶의 용기를 불어넣어 준 그 시대의 예언자였으며,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보내 주신 위안의 목회자로 평가 할 수 있다. 그는 부흥사로 주님의 일을 시작한지 50년 동안 한국내를 비롯하여 중국과 시베리아 그리고 일본에까지 그의 발길을 옮겨 부흥회를 770여회 인도하였고, 150여 교회를 설립했으며, 1만여명의 불치병 환자들이 고침을 받았고, 그로 인하여 목사가 된 사람이 2백여명에 이르렀다.
무엇보다도 이적치병(異蹟治病)현상을 중심적인 내용으로 하였던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은 1920년대와 1930년대의 한국교회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익두 이후의 부흥운동에서 그의 방법이 대개 유형적으로 답습되었다는 의미에서 볼 때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에 대한 이해는 한국교회 초기 부흥운동의 원형을 살펴보는 길잡이가 된다고 평가 할 수 있겠다. 또한 김익두 부흥운동의 기본적인 사역에 비추어 그의 부흥운동은 마귀를 물리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스스로의 눈으로 직접 목격하게 함으로 직접적인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고 엄청난 좌절 속에서 눈에 보이는 징표를 구하던 성도들에게 그것을 현실화 시켜 가시화(可視化)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에 큰 긍정적 평가를 둘 수 있겠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사의 한 전환기에서 내면화되어가는 도도한 흐름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부흥운동은 상당한 정도의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우리는 그의 일생을 연구하면서 교육적 배경이 별로 없는 한촌의 신앙인 김익두를 1919년 이후의 사회 전환기에 보낸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볼 수 있다.

    2. 부정적 평가

김익두 목사가 행하는 신유은사를 퉁한 이적기사가 속출하자 이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시 말하여 김익두 목사가 행하는 이러한 기사와 이적은 미신적인 신앙이며 우매한 자들을 거짓신앙으로 미혹시킨다는 평가였다. 그러한 이적의 성취와 병고침이 거짓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그를 사기꾼으로 매도하는 일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자들의 격한 반발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에 대하여 많은 소문이 있을 때에 황해도 재령의 임택권(林澤權)목사는 1919년 ‘이적명증회’를 발기하여 3년동안 조사한 끝에 그것을 1921년 「조선예수교회이적명증」이라는 책자로 발간을 하였다. 또한 황해노회는 1922년 장로회 총회에 건의하기를 장로회 헌법 정치 3장 1조에 “금일에는 이적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 라는 조항을 수정할 것을 헌의하였는데 총회는 이 안건에 대해 사도신경과 성경진리에 위반되는 조건이 아닌것이므로 개정할 필요가 없다고 결의하고 각 노회에 회부하였는데 그 결과는 부결되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김익두 목사의 신유 부흥집회는 고비를 맞게 되었다. 이런 부정적인 비판과 공격은 1926년에 이르러서는 극에 치닫게 되었는데, 이것은 공산주의의 표면적인 반 기독교 운동의 전략 채택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그가 담임했던 남대문 교회의 신진 유식 신도층에서도 이와같은 부정적 비판을 가했었다. 어쨋든, 김익두 목사는 한때 자신의 부정적인 평가에 의하여 한때 병고치는 기도를 삼가하기도 하였고 그 수를 제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김익두 목사의 신유이적은 오늘날에도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위와같은 극단적 부정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박스터(J. S. Baxter)는 신유사역의 영속성과 지속성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신유의 사역과 은사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라고 거듭 강력히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Ⅳ.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

   A. 생애요약

    1. 가정환경과 어린시절

이용도(李龍道)는 1901년 4월 6일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이덕흥(李德興)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호는 시무언(是無言)이다. 그의 아버지는 평범한 사람으로 장터에서 관노릇을 하였지만 엄청난 술고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신앙인이었고 시변리 교회의 전도 부인이었다. 이용도의 부모님은 이렇게 서로 대조적인 생활을 보이는 부부생활 속에서 잦은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용도의 어머니는 몇번이나 자살을 기도한 일도 있었다. 이와같은 가정환경 속에서 이용도는 어머니의 신앙적 행위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자라게 되었고 항상 어머니를 존경하였다. 그는 13세부터 밤을 세워가며 기도하는 습관을 가졌다. 또한 그는 어려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병약한 체질에 정(情)이 많은 아이였고 감수성이 예민하였다.

    2. 학창시절과 투옥생활

시변리에 있는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5세 되던 해에 개성에 있는 한영서원(송도보고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이용도는 남들은 4년이면 졸업하는 중학시절이 그에게는 9년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식으로 졸업장도 받지 못하는 아픔과 설움을 겪었다. 그의 중학시절 9년 동안은 그 전부가 고민이요, 눈물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자신이 직접 학비를 벌어야 했으며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역사적인 3.1운동이 터졌을 때에 그는 19세였고 개성에서 그 운동에 가담을 하였다. 그 결과 그는 체포되어 약 2개월간 구금되었다가 석방이 되었으나 그후 1년도 못되어서 그는 또다시 독립운동에 관련되어 체포되고 1920년 2월 11일에 있었던 소위 기원절(紀元節)사건으로 인하여 이번에는 6개월간 개성 소년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형무소에서 풀려나온 그는 다음 해인 1921년 9월에 그의 고향인 시변리 영신(永信)학교에서 얼마간 교편생활을 하다가 이번에는 불온문서 사건에 관련되어 그 해 성탄절에 또다시 체포되었고 약 6개월간 투옥되었다. 이러한 계속된 투옥생활 속에서 이미 일본경찰들 사이에서 이용도라는 이름은 요주의 인물로 정평이 나게 되었다. 그는 출감 후에 송도보고 3학년에 복교를 하였으나 학교당국에게는 그가 눈의 가시였다. 1922년 가을에 그는 또다시 태평양회의 사건에 연류가 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고 징역 2년의 선고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이 되었다.

    3. 협성신학교 시절   

이처럼 독립정신과 민족을 사랑하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이 젊은이를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선교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당시 송도고등학교 교장으로 일하던 왓슨(A. W. Wasson)선교사였다. 그는 독립투사 이용도를 목사로 만들기로 결심을 하고 그를 서울의 협성신학교에 추천을하여 입학하게 하였다. 이제 신학생이 된 이용도는 처음에는 별로 신학에 관심을 느끼지 못하였으나 차츰 이환신(李桓信), 이호빈(李浩彬) 등과 같은 동역자와 함께 깊은 형제애를 나누면서 유무상통의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용도는 점차 자신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를 위해 바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원래 몸이 약했던 그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도중에 각혈을 하는 폐병 3기의 위험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그의 친구 이환신의 고향인 평남 강동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그는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신학생이 왔다는 말을 듣고 그 곳 교회에서 그에게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가 강단에 올라가 섰을 때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무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는 이용도를 본 성도들도 따라서 같이 눈물을 흘렸다. 찬송을 불러도, 기도를 해도 온통 눈물의 바다를 이룰 뿐이었다. 이 집회를 통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직접 가슴에 와닿는 체험을 한 것이다. 이 집회동안 경험한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 체험은 그의 일생을 두고 한 번도 잊어 본 일이 없었다. 또한 그는 1927년에 ‘십자가를 지는 이들’ 이라는 제목의 성탄절 성극에 연출을 맡아 보면서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하게 되었으며 말이 아닌 체험의 신학을 배우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용도가 경험한 4년간의 신학교 생활은 독립사상과 신앙에서의 갈등, 동요와 성극에 열중하던 시기, 폐결핵 진단 후 신앙으로의 심취와 헌신에 이르는 격동의 시기였으며 결국 그는 1928년 1월 28일 제 14회로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4. 목회와 부흥사시절부터 임종때까지

1928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이용도는 그 이튿날인 29일에 강원도 통천으로 목회임지를 파송 받았다. 교회담임 초기의 이용도는 이상적인 전도인이요, 문학인이었다. 신앙에 확신은 있었지만 신앙생활 보다는 문화적인 활동이 항상 앞서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금식 산기도를 10일간 하였고 그 이후 부터는 기도하기에 힘쓰고 교회일에 열성적이 되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새벽 3시에 성전에서 기도하던 중 흉측한 모습의 마귀와 싸우게 되었고 드디어는 그 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하는 체험을 하였다.
그 새벽 3시의 체험 뒤부터 이용도는 권능과 용기를 얻어 강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불과 50명에 불과하던 통천읍 교회가 몇주일 후에는 150명으로 교회가 꽉차게 되었다. 그 후에 그는 그가 담임한 구역내 7개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계속하여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1930년 2월 26일부터 3월 9일까지 평양중앙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이곳에서도 역시 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고 이용도의 명성은 전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930년 9월 28일 연합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용도 목사의 부흥회는 가는 곳마다 열화같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부흥회는 비단 감리교회 뿐만 아니라 교파를 초월하여 평양 장대현교회와 같은 장로교회에서도 그를 불러 부흥회를 열게 하였다.
그러나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기성교회 목사들 사이의 질투와 시기심에서 작용된 것이기도 하였지만 황해도 재령교회에서의 부흥회에서 그 교회를 혼란케 했다는 명목으로 황해노회에서는 그에게 금족령을 내렸으며 그것을 계기로 이용도 목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평가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용도 목사는 자신의 신비주의적 부흥회 인도방식과 그 과정에서 여신도들과의 서신거래와 불을 끄고 기도하는 것 등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으며 또한 지나치게 기성 교역자들을 비판하고 무교회적인 신학을 펼치는 경향이 있어 이것 또한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장로교 총회는 1932년 제 22차 회의에서 이용도 목사를 ‘이단’ 으로 정죄하고 장로교 내에서는 그의 출입을 봉쇄하기에 이르었다.
이러한 비판의 소리가 들려오는 상태에서 이용도 목사 자신도 또한 많은 사건과 소란을 남겨두고 생활했으며 결국 그는 해주지방에 집회를 갔다가 몇몇 교인들로부터 뭇매를 맞고 원산에서 치료를 하다가 지병인 폐병이 짙어져서 결국 1933년 10월 2일 원산에서 가족 친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33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의 소원대로 모든 것을 다 빼앗긴채 그는 눈을 감았다.
  
   B. 시대적 배경

    1. 사회적 배경

1919년에는 3.1운동이 발발하였고 이에 따른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이 있었다. 이러한 불만이 쌓여 6.10만세 사건으로 폭발하였다. 학생들의 동맹휴교사태(1926̴28) 에 이어서 광주학생운동(1929),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등이 연속적으로 발생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적 압박과 탄압기요, 혼란과 격동기였다.
경제적으로는 봉건지주의 착취가 심한 시기였다. 그리고 일제의 수탈이 너무나 심하여 농민들은 땅을 버리고 도시로 이주하는 현상의 속출을 가지고 왔다.
1930년대에 노동자의 수가 거의 100만에 이르렀고 실업자의 수효가 급증하였다. 1930년대 조선 농민의 6백만명이 실질상 절량 상태에서 헤메었으며 1931년에는 1200만이 고율의 소작료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는 실로 전 인구의 반에 해당하는 엄청난 비율이었다. 이것은 반영구적인 기아상태와 전민족적인 빈한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이 급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이들 공산주의 세력은 기층 민중과 농민을 상대로 지지기반을 견고하게 구축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미국과 연관된 것이라면 공산주의는 소련과 관련되어 있었다. 소련의 영향권에 있던 공산주의가 한국교회의 보수성을 공격하면서 혁신적인 자세를 표방하고 나섰다. 이들은 혁신을 주창하면서 배타적 민족주의와 연결되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교회와 공산주의와의 충돌이 불가피 하였다.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강화로 사회는 어둡고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회에는 절망감이 팽배하여 질식할 듯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의 상황은 불안감과 경제적 소외의식, 그리고 사회적 불신풍조가 지배하는 시기였다.

    2. 기독교적 배경

1920̴1930년대의 교회에 관한 사적은 찾아 보기가 매우 힘들다. 그래서 정확한 상황판단을 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각 교단의 회의록이나 기타 문서를 추리해 본다면 이 당시의 한국교회는 어느정도 한국초대교회의 열의와 박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시의 한국교회는 3.1운동의 실패등으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교회와 미국의 역할에 대한 회의를 느낀 사람들이 점차 교회를 등지고 떠나가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이때 밀려오기 시작한 사회주의, 공산주의에로 빠져들기 시작하여 오히려 교회를 적대시 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교회에 대한 반감은 사회주의자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으니 당시 교역자들의 낮은 지적 수준으로 인하여 민족이 당면한 난관들을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현실에서 도피한채 사회정의나 평화를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회칠한 무덤같은 예루살렘의 조선이여!” 하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설가 이광수는 당시 교역자들의 무지를 통열히 지적하고 있음을 본다.
현시 조선 교회는 전제적, 계급적이요, 야소교의 근본 특징인 자유, 평등 등의 사상을 몰각하였으며 종교의 신앙을 인생의 전체로 여겨 신자, 비신자의 구별을 선인, 악인의 구별같이 하고■■교역자가 문명을 이해하지 못하여 다수한 교인을 미신으로 이끌어 문명의 발전을 저해하여 미신적 신앙을 고집하여 문명적 종교의 사명을 감당치 못한다.
더구나 일제는 한국교회를 미국의 선교사들에게서 탈취하려고 일제 통치의 어용도구인 조합교회를 설립하여 교회분열을 획책하였다. 이렇게 교회는 일제의 탄압의 시련 속에서 안팎으로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의 성장은 둔화되어 가고 있었고 율법주의적 형식화로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또한 이미 이때부터 지방의식과 외국에서 교육받은 목사들과 국내에서 교육받은 목사들 사이에의 갈등과 감정적 대립 등으로 교회분열의 상처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무엇보다 뚜렷한 변화는 이때까지 한국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외국선교사들의 영향력이 약화 되면서 사실상 외국 선교기관이 폐쇄되기에 이른 점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후견자가 없어진 상황에서, 그리고 민족적 시련과 내외의 거센 도전 속에서 스스로 서지 않으면 안될 운명에 놓여진 것이다.
이렇게 정치적, 사회적, 교회적으로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이용도 목사는 특히 당시의 교회를 치명적으로 병들었다고 진단하고 그 시대를 치유해야 한다는 새로운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C. 부흥운동의 특징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이 가지는 전반적인 특징으로는 우선 이용도 목사 자신이 경험하는 신비주의적 체험에 기초한 부흥회 형태를 말할 수 있겠다. 특히 개인의 영적감동에 의존한 무원칙과 무형식의 부흥회인도방식에서 그 독특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합일(合一)을 추구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한 그의 신앙핵심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겠다. 동시에 당대의 교회의 부조리와 기성 목회자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선지자적인 설교전달에서 보이는 예언자적인 형태의 부흥회 성격도 그 특징으로 볼 수 있겠다.
   
    1. 신비주의적(神秘主義的) 체험에 기초한 부흥운동

    1) 개인의 영적감동에 의존한 부흥회 인도방식

한마디로 이용도 목사는 새로운 방식의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의 부흥회 스타일은 선교사들이 주도했던 1907년의 부흥회와는 아주 다른 개인적인 신비주의에 입각한 형식의 부흥집회였다. 상황마다 느껴지는 그의 즉흥적인 감(感)과 일정한 원칙이 없이 이루어지는 오로지 개인의 영적감동에 의존한 부흥회였다. 이용도가 보이는 개인의 영적감동에 의존한 부흥회 인도방식은 다음과 같다.
그는 사람을 모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조직하거나 선전하지도 꾀도 부리지 아니하였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설교를 약하고 기도만 몇시간씩 하거나 또는 공중기도를 3̴4시간씩 시킴으로써 집회를 끝마치기도 하였다. 그의 설교에는 어떤 인간적인 기교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전체를 청중들에게 문자그대로 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집회기간동안은 그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엎드려서 기도하면서 스스로가 은혜를 사모하며 받음으로써 청중들에게 그 본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또 그의 스타일은 설교를 계속하다가 감격이 최고조에 달하였을 때 잠간 설교를 중단하고 찬송가를 택하여 청중이 함께 부르게 하고 은혜를 만족케 한 후에 다시 설교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설교시간도 어떤 때는 10분으로 끝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계속해서 눈물과 땀 속에서 7시간이나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용도식의 부흥회 스타일이 이 때부터 유행하게 되었다.
이용도 목사가 보여주었던 부흥회 방식에 대하여 이러한 신비주의적 측면을 입증하는 글을 남긴 사람은 당시 「신앙생활」의 주필자였던 김인서(金麟瑞)였다.

이용도 목사의 부흥식이라면 식이고, 파격이라면 파격이겠다. 보기에는 갈대같이 약한이가 강단에서는 사자같이 강하다. 이목사의 기도란 영에 읊어지는 시편이거나 하늘에 닿는 긴 호소이오. 그의 설교란 생명에 떨리는 핏방울이거나 진리가 흐르는 처계수의 한폭이다. 복음에서 생명으로 구원보다 예수의 정체에, 신학보다 진리에, 의식보다 체험자체 등을 이목사가 강조한 점이다.
  
이용도 목사가 이러한 성격의 부흥회를 인도하게 된 근저에는 그의 신비주의적 신앙이 가장 큰 영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용도는 일정한 원칙과 질서를 무시하고 즉흥적인 감(感)에 의한 부흥회를 인도한 것은 그의 새로운 시도였다. 그의 감(感)의 신앙에 기초한 설교와 전도활동은 그 당시의 한국교회 신도들에게 광범위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부흥회 스타일과 신앙양태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용도는 그의 감(感)의 신앙에 대한 실천적 원리로서 기도와 찬송을 제시하였다. 기도는 믿음이 자라나는 모판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용도에게 있어서 기도하는 일은 곧 믿는 일이었고 잘 믿는 자는 잘 사랑하는 자였다. 이용도에게 있어서 기도는 능력의 원천이었다■■기도와 찬송은 감(感)을 일깨우는 수단이었다■■그는 지적인 교리를 중요시하기보다는 능력을 중요시했으며 그 능력은 기도와 찬송을 통해 가능해지는 하나님과의 합일(合一)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이었다. 물론 하나님과의 합일은 느낌(感)으로 구현되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이용도 목사의 부흥회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성격의 부흥회로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개인의 영적감동에 의하여 인도되고 진행되었던 부흥운동이었으며 서양의 많은 신비주의자들과 같은 맥락에서 보여지는 신비주의 부흥운동이었다.

    2)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합일(合一)을 추구하는 부흥회

이용도 목사는 그 자신의 신앙생활의 최종목표를 그리스도와의 합일로 삼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가 인도하는 부흥회의 최종목표도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합일이었으며 그러한 성격이 그가 인도하는 부흥회의 특징이 되었다.
이용도 목사에게 있어 그리스도와 완전한 합일은 이루는 방법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다.
이렇게 주님은 나에게 이끌리시고 나는 주님에게 끌리어 하나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주의 사랑에 삼키운바 되고 주는 나의 신앙에 삼키운바 되어 결국 나는 주의 사랑안에 있고 주는 나의 신앙안에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 오묘하도소이다! 합일의 원리여! 오̴ 나의 눈아, 주를 바라보자. 잠시라도 딴 눈을 팔지 말고 오직 주만 바라보세. 나의 시선에 잡힌 바 주님은 나의 속에 안재(安在)하시리라. 오̴ 나의 눈아, 일심으로 주만 바라보자. 주께서 피하시랴, 피치 못하시게 다만 그만 바라보자.
이용도 목사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성이 배제된 초월적 존재로서 이해되고 있다. 이용도 목사는 궁극적으로 합일되어야 할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합일되는 것은 나를 버림는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에 너는 무엇이 되려고도 말고 무엇을 바라지도 말라. 다만 전체를 주께 맡길 따름이니라. 그리고 부절(不絶)히 주의 손의 가공을 받아 묘할 것이었나니라. 주의 작품이 일양(一樣)이 아니나 그러나 주의 뜻이(크게나 적게나) 그 속에 잠기어 있는 일체(一體)니 고로 무엇에서든지 주의 성의(聖意)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니라.
이렇게 이용도 목사는 자신의 신앙체계를 신비주의 속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합일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당연히 그의 부흥회의 인도방식이나 성격은 그것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2. 예언자적인 활동에 기초한 부흥운동

이용도 목사는 투쟁의 삶을 살았다. 그의 투쟁은 내적으로는 자신의 욕망과의 투쟁이었고 외적으로는 교회의 죄악과 타락상에 대한 투쟁이었다. 이러한 이용도 목사의 외적 투쟁은 당대의 많은 교회와 기존 교역자들의 문제점들과 부조리 등을 그대로 파헤치며 들추어내어 비판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형태의 부흥회 성격을 가지게 하였다.
이용도 목사가 세례요한과 같이 ‘광야의 소리’ 가 되어 타락한 교회를 깨워서 새용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주려는 예언자적 열정을 보여주는 구절이 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예수 선전자나 기독교 주문도리 취급자만 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미친 듯이 울부짖는 ‘광야의 소리’ 가 되게 하시고 새 술에 취하듯이 덤비는 사랑의 사도가 되게 하소서. 아멘.”
이용도의 광야의 소리 내용은 첫째가 회개, 그 둘째가 기도, 그 셋째가 사랑이었다. 그런데 그의 회개를 요구하는 대상들 즉, 그의 예리한 공격의 대상은 주로 다음의 3가지 부류의 대상이었다. 즉 형식화한 기성교회와 거만한 목사와 특히 직업적 부흥사와 선교사들이었다.
이러한 그가 행하는 부흥회의 비판적 성격으로 인하여 이용도 목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기존의 교역자와 교계의 핍박을 받게 되었는데 한 번은 이용도 목사가 1931년 6월 8일부터 12일까지 평양의 남문밖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였다. 은혜를 받으려고 모여든 사람도 있었지만 이중에는 당시 장로교의 몇몇 거물급 목사들이 이용도 목사의 집회를 감찰하려고 참석한 적이 있다. 막상 이들이 이용도를 책잡을 구실을 찾으려고 그 집회에 왔다가 오히려 이용도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가슴에 찔림을 받아 은혜를 받고 그 자리에서 통회하고 말았다는 장면은 그 시대에 이용도 목사가 분명히 예언자적인 목사였으며, 그의 설교에는 권세가 있었다는 그의 부흥집회의 특징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하는 좋은 예증이라 할 수 있겠다.

    D. 부흥운동의 평가

이용도와 그의 부흥운동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긍정적인 면에 있어서는 한편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물이며 그의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에 커다란 업적이었으나, 부정적인 면을 본다면 매우 위험스러운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는 이용도의 부흥운동이었다.

    1. 긍정적인 평가

일단은 그의 개인적인 청빈생활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신앙관을 가지고 그 당시의 험란한 시대의 성도들을 부흥회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이끈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으며, 또한 그의 청빈생활의 실천적인 모습은 그의 부흥회를 통하여 많은 성도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촉매의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 할 수 있다. .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가 한 번 기도를 시작하면 3일이고 일주일이고 무아의 경지에서 기도를 하였다. 부흥회 기간중 설교시간에 기도만 하고 끝나는 때도 있었다. 한국교회에서 그의 기도를 따를 사람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다. 물질에 대해 추호의 탐심도 없었고 새두루마기를 길가의 거지에게 그대로 벗어주고 부흥회에서 받은 거마비를 거지에게 봉투째 준 일은 비일비재하다.
위의 인용문에서 밝힌대로 이용도 목사는 그의 부흥회를 통하여 전국적으로 기도의 열정을 회복하게 하였다. 한국교회에 기도가 없다는 것을 크게 한탄한 그는 자기 스스로가 기도에 미치고 기도의 사람이 됨으로써 기도의 열심에 불을 붙였고 또 들과 산골짜기는 기도할 곳을 찾아 모여드는 사람들로 덮이게 되었다.
이용도 목사의 감회와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젊은이들이 평생을 주님을 위하여 몸바치기로 결심하는 결단의 단계로 이끌어 갔다는 점에서도 이용도의 부흥집회는 높이 평가 될 수 있다. 즉 유능한 청년들이 교역에의 길로 마음을 굳히게 된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이들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경우, 조신일, 이호운, 명관조, 김광우, 변종호, 김용련, 박재봉 등의 쟁쟁한 인물들이 목회자로 부름받아 해방전후의 한국교회를 실질적으로 부흥시켜던 주역들인 것이다.
   
    2. 부정적인 평가

그러나 이용도 목사는 지나친 그의 신비주의의 경향으로 인하여 많은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제너(R. C. Zaehner)는 기독교적 신비주의와 비기독교적 신비주의를 구분하면서 “기독교의 신비주의는 영적인 교제이지 무조건적으로 하나로 통일되며 오로지 합일만을 주장하는 것은 비기독교적 신비주의이다.” 라고 주장했다. 이용도 목사의 비기독교적 신비주의의 결과는 일단 우리 장로교에서 1933년 9월 제22회 총회 때에 이용도 목사를 이단으로 정죄한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933년에 감리교 역시 그를 면직처분한 것에서도 그것은 증명이 된다. 이용도 목사가 가지고 있는 신비주의적 경향의 극단적 해석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평가가 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지나친 것이다. 그는 무조건의 사랑을 표방하면서 심지어 사탄에게도 배울 것이 있으며 불경(佛經)이나 사회주의 책에서도 배울것이 있다고 강조하는 한편 신학과 교리의 기독교를 공격함으로써 신비주의 공통의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또한 그는 세속화된 기성교회와 지도자들을 지나치게 비판하고 공격함으로써 스스로의 입지를 좁게 만들었으며, 특히 기성교회를 전혀 희망이 없는 마귀의 집단과 같이 매도한 것은 성령의 역사가 기성교회에 있는 것 자체까지 부정하는 결과가 되어 버렸다.
특히 이용도의 극단적인 신비주의적 색채가 기성교회의 거부감을 불러일으켰고, 이 때문에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의 신비주의는 결국 기독교의 원론적 진리를 뛰어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고, 이는 자신의 신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가 증명하는 결과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그가 원산의 접신녀(接神女)인 유명화(劉明花)에게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착각하여 그녀 앞에 엎드려 “주여!” 라고 한 데서 단적으로 나타났다. 목사인 그가 사이비 접신파(接神波)들과 어울려 귀신들린 여자 평신도인 유명화에게 엎드려 ‘주님’ 이라고 부른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이용도 목사와 그의 부흥집회를 용납할 수 없게 하는 결정적인 그의 실수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성간의 성애(性愛)로 전락시켜서 지나친 해석적 오류를 낳았고, 여신도들과 필요이상의 무분별한 편지를 서로 교환하고, 후에 백남주, 유명화, 이유신, 이호빈 등과 결탁하여 신탁을 빙자하면서 ‘예수 교회’ 라는 일파를 신설하면서 무분별한 접신극과 주술을 하는 등, 기성교회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적을 많이 남겼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용도의 평가에 대하여 그의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평가를 내려야 한다. 전기에는 즉 사이비 접신파들과 놀아나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의 신비주의적 요인을 긍정적으로 교회가 이해하고 평가하며 용납될 소지가 있었다. 어두운 시대에 신선한 새로운 신앙적 충격이었으며 한국부흥운동의 새로운 신비주의적 길을 제시하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 접신녀와 그 추종자들과 행한 그의 행동은 도저히 기존 교회가 그의 부흥운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 오점이 되는 것이다.
나이가 비교적 젊었고 병이 너무 짙었던 것이 그의 신학이나 사상을 성숙하게 하지 못한 중요 원인이라 판단이 되어 많은 아쉬움을 남기는 인물이다.
 

 

 


  
  

 


   Ⅴ. 세 부흥운동의 차이점

   A. 특징과 성격에 있어서 보이는 차이점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가 보여준 각각의 부흥운동의 특징과 성격에서 분석할 수 있는 차이점을 김인수(金仁洙)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의 구원과 교인들의 신앙적 각성과 부흥을 위한 사경회와 부흥회를 이끌고 갈 지도자들을 마련해 두셨다. 이들은 1907년 대부흥운동의 기수였던 장로교회의 말씀의 사자 길선주(吉善宙) 목사와 전무후무한 신유(神癒)의 기사를 행하며 각처를 돌던 김익두(金益斗) 목사, 그리고 감리교회 목사로서 한국 교회에 신비주의의 전형을 보여준 이용도(李龍道)였다.
또한 김인수 교수는 계속해서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을 소개하면서 길선주,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와 비교하며 이 세 목사의 부흥운동의 차이점을 다시금 분석하고 있다.
감리교 목사였던 이용도의 부흥운동은 장로교회의 목사들인 길선주, 김익두의 부흥회와는 달리 독특한 방향에서 출발하여 결국 이단 정죄로 끝나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길선주 목사의 부흥은 철저한 성경공부에 기초하고 있었고, 김익두 목사의 부흥이 신유의 이적 역사에 기초하고 있었다면, 이용도 목사의 부흥은 이 목사의 개인의 영적 체험에 근거한 신비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두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이 세 부흥목사들의 부흥운동에는 분명히 그 특징과 성격에 있어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특별히 김인수 교수는 길선주 목사에게는 ‘장로교회의 말씀의 사자’ 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철저한 성경공부에 기초했다’ 라는 평가를 내렸으며, 김익두 목사에게는 ‘신유의 기사를 행하며 각처를 돌았다’ 라는 표현을 또한 사용했고, 이용도 목사에 있어서는 ‘한국 교회 신비주의의 전형’ 또는 ‘개인의 영적 체험’ 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세 목사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다. 더불어 우리가 위의 각각의 장에서 분석했던 세 부흥운동의 특징을 차례대로 살펴보더라도 이러한 차이점은 더욱더 확실하게 분석되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1907년을 중심으로 한 길선주 목사의 부흥운동을 김익두, 이용도 목사 비교하여 그 차이점을 설명한 글에서도 이와 똑같은 평가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병든 교회와 시대에 대하여 예언자적 음성으로 나타난 사람이 김익두와 이용도이다. 김익두와 이용도의 부흥운동은 1907년의 부흥운동의 양상과 성격이 달랐다. 김익두 목사는 신유와 기적을, 이용도 목사는 신비적 경험을 통하여 시대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용도의 독특한 부흥회 인도방식을 길선주 목사의 부흥운동과 비교하여 언급한 또다른 구절이 있다.   
그는 새로운 형태(용도식)의 부흥회를 시작하였다. 그의 부흥회 방법은 선교사들이 주도했던 1907년대의 부흥회와는 달리 토착적 신비적 타입의 집회 형식이었다. 구체화된 토착화 신학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관심은 구라파의 옷을 입고 서구식으로 변해 버려 한국인에게 걷도는 복음을 한국인의 심성으로 받아들여 토착회 했으며, 그의 신비주의적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평가 외에도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을 언급하면서 길선주 목사와 비교하여 설명한 구절도 동일한 설명을 하고 있다.
한편 김익두(金益斗, 1874̴1950) 목사의 부흥회는 또 다른 양상으로 민중세력을 형성했다. 그로 인해서 형성된 기독교의 민중 세력은 길선주 목사의 선도(仙道) 정신을 바탕으로 한 내적 영력인 데서보다 그의 기도의 능력과 가슴을 칼로 찌르는 듯한 성령의 내적 임재의 체험과 신유의 은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여러 평가에 근거하여 우리가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은 분명히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에는 그 특징과 성격에 있어 혁혁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길선주 목사는 한국교회의 기틀과 올바른 신앙성장을 위한 말씀중심의 사경회를 주도 하였고, 김익두 목사는 아픔과 고통 가운데 신앙의 기준이 흐려지고 회의와 의심에 빠진 고난의 성도들을 위한 확실한 신유이적의 병고침으로 부흥운동을 인도하였으며, 이용도 목사는 완전한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주장하며 종교적 사랑으로 끌어가는 신비주의에 근거한 부흥회였음을 주장 할 수 있겠다.
사경회는 길선주 목사 부흥운동의 주요 무대였다. 길선주 목사 그는 선교사들 보다 더 보수적인 성격을 가지고 오로지 성경중심과 경건생활중심의 교회전통을 한국교회의 신앙형태로 구축시킨 한국교회 정신의 개척자이다. 길선주의 부흥운동은 사경회를 통한 말씀중심의 특징을 지녔는데 일정한 형태가 갖추어 지기 전에는 몇 사람이 한 장소에 모여 성경을 공부한 것을 일컬어 사경회라고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경회가 진행이 되는 동안 점차적으로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시작하여 성경지식이 증진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었다. 또한 각지에서 온 신자들의 교제의 장소도 되었고, 신앙생활의 지혜나, 도움이 될 간증을 나누는 곳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경회는 일종의 성경학원이기도 하면서 신앙대회와 문화경연회를 겸한 것이었다. 사경회는 집중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이었다. 여기에서는 성경의 어떤 책 혹은 교리적인 주제를 공부하고 특별한 훈련이 행해졌다. 성경에 대한 지식은 꼭 필요한 것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신앙부흥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전통적 의미에서 신앙부흥은 일어나지 않는다. 유럽과 아메리카 교회들에서의 신앙부흥은 오랜 세월에 걸쳐 가정과 교회에서 주의깊게 성경을 읽은 결과였다. 한국의 신앙부흥에서도 큰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은 장로교회가 1895년에 한국에 이식되었을 때부터 교회 치리의 본질적인 부분에 사경회를 통한 철저한 성경공부를 시켰다는 것에 기인한다. 우리 한국백성들은 좋은 글을 숭상하는 전통을 이어왔고 또 수백년 동안 우리 나라는 그러한 고전들을 지니고 살아왔기 때문에 동양의 고전인 성경이 우리 민족에게 주어지자 우리 민족은 사경회를 통하여 성경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열렬히 환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경회에서 인기가 있었던 강사가 바로 길선주 목사였던 것이다. 사경회에서 이와같이 성경을 공부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모든 하나님의 권위가 신자들의 삶을 조절하도록 가르쳤다. 선교사의 말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찍이 신자들의 신앙과 생활의 규칙이 되어있었다. 신자들은 사경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면서 그들의 신앙과 삶을 새롭고 올바르게 하였다. 이처럼 길선주의 말씀중심의 부흥운동은 사경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한편, 김익두 목사는 병고침의 신유은사를 통한 부흥운동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신유(Divine Healing)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한 신앙의 치유를 말한다. 출애굽기 15:26에 나타난 ‘치료하는 여호와’에 대한 말씀은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치료와 건강이 하나님의 속성임을 보여준다. 브라운(R. E. Brown)은 신유사역이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표출로서 하나님의 사랑이 신유의 치유를 통해 병자에게 흘러들어가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또한 보그스(Boggs)는 “신유란 하나님이 보여주는 신적인 동정(Divine Compasion)의 표현이다.”라고 정의했다. 신유라는 단어자체는 성경에는 직접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병을 고친다는 말은 나오고 있다. 1921년 김상준 목사가 출판한「사중교리」라는 책에서 많이 인용이 되었고, 1925년 카우만(C. E. Cowman)선교사를 편집인으로하여 길보른(E. A. Kilbourne) 선교사가 출판한「성결지침」(A Guide to Holiness)이라는 책에서도 여러번 인용이 되었으며, 1933년에 이명직 목사의 「성결교회 임시약법」에서 신유라는 단어를 찾아 볼 수 있다. 이명직은 신유를 “하나님의 약속하신 성경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약과는 관계없이 기도함으로 병이 나음을 입는 것이다.” 라고 정의했고, 이성주는 신유를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병에서 깨끗하게 낫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신유를 일반신유와 특별신유로 구분을 하기도 하였다. 일반신유는 하나님의 보호로 연약한 몸을 가지고도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생활하는 것이며 특별신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함으로써 병고침을 받는 것을 말한다. 토레이(R. A. Torrey)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병을 치료하실 때 치료될 만한 믿음이 있으면 즉시, 완전히 그리고 경이적으로 치료하신다.”라고 말했다. 라이스(Rice)는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병자를 위하여 기도하면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 보이시며, 즉시 질병이 낫게 된다고 하여 신유를 기도의 응답을 통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성품이 불완전한 인간에게 반영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트랜취(R. C. Trench)는 신유의 이적이 인간 편에서 병이 낫고자 갈망하는 신앙과 하나님 편에서 신유의 은혜를 채워 주시고자 하는 양편이 연결될 때에 일어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인간편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빈마음과 신유의 은혜를 채워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생명선과 같이 연결되어질 때 병고침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신유의 은사를 통한 치유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죄인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며 이러한 치유의 은사는 정신, 정서, 영적인 병을 고치기도 하였다. 김익두 목사는 기도를 통하여 신유의 병고침 기적을 베풀었는데, 이와 같은 의미에서 기도는 치유의 핵심이며 내적치유도 기도상담(Prayer Counseling)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살펴볼 때 신유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절대적 신뢰에 의하여 병자가 육체적, 정신적, 영혼의 고침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정의 할 수 있으며 김익두 목사는 신유부흥집회를 통하여 이것을 현실화 시켰던 부흥운동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김익두 목사가 행한 육체의 치유가 순수하게 육체적인 단계에서 마칠 수도 있으나 이것을 영적인 차원까지 연결하여 이 둘이 서로 결합된 상태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전인적인 치유의 통전적 구원(Total Salvation) 을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프랭클(V. E. Frankl)은 질병을 치유함에 있어 전인적인 치유를 강조하면서 인간이 육체적, 정서적 그리고 영적인 차원에서 살아가는데, 특히 영적인 차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영혼이 있기에 우리가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체적 질병과 영적인 불안 사이의 깊은 내적인 관계는 항구적으로 목회적 지혜의 관심사이다. 모든 목사는 영적 성장의 가능성들을 더 높히기 위하여 신체적인 결합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영적인 성장이 육체의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중시하여 영혼을 치유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성령치유운동은 1919년 이후 10여년에 비 신앙적 사상과 망(忘) 교회적 풍조가 교계에 범람하는 중에 오히려 신앙을 보수하여 교회가 재진흥하게 한 성령님의 감화였으니 김익두 목사가 행한 신유부흥운동의 역사적 지위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반면에 이용도 목사는 신비주의라고 하는 독특한 자신만의 특징과 성격을 지니고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일반적으로 신비주의는 신비적 존재와 나와의 직접적인 교분내지는 융합을 지친해서 쓰이는 말이다. 사실상 이 세상에서 신비성을 내포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종교란 그 자체가 신비성을 의미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신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성도는 신비적 체험을 갈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뜻은 신(神)이나 절대자등 영적인 실체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이나 통찰력을 통한 내면적인 일치의 체험을 중요시하는 철학적 또는 종교적 사상을 말하며 보통의 지각방식이나 논리적 추리에 의하지 않고 얻어지는 신앙을 말한다. 스테시(W. T. Stace)는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상태를 “공허와 충만의 역설(The Paradox of Vaccuumplemum)"이라는 명제로 표현했다. 즉  우리들 마음속에서 모든 대상과 내용을 송두리째 제거해 버리고 우리의 빈마음에 절대자의 존재인식으로 가득차게 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주의에 입각한 부흥운동을 한국교회에 최초로 일으킨 사람이 바로 이용도 목사이다. 사실상 기독교의 신비주의는 우리의 신앙생활과 윤리적 삶의 원동력이며 역사참여의 원동력인 것이다. 또한 성경에도 분명히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있으며 교회역사 어느 시대이든지 신비주의적 신앙형태는 발견되고 있다. 우리 한국교회의 역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용도 목사는 바로 이러한 신비주의의 방법으로 한국교회 신앙형성에 이바지했던 것이다. 특히 이용도 목사는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합일’ 을 강조하였는데 우리의 구원은 이러한 신비적 연합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용도 목사는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이용도 목사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신비주의는 깔뱅(J. Calvin)의 주장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깔뱅에게 있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론의 기초를 이룬다.” “중생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가능하다. 우리와 그리스도가 성령의 신비한 역사로 연합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축복과 구원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신비주의적 형태를 밝히 볼 수 있다. 이 형태를 민경배 교수는 ‘그리스도 신비주의’, ‘고난 받으시는 예수-신비주의’ 라고 했고 변선환 교수 또한 ‘예수 신비주의’ ‘고난받는 그리스도 신비주의’, ‘고난의 신비주의’, ‘요한의 신비주의’, ‘성애(性愛)의 신비주의’, ‘아가적(雅歌的) 신비주의’ 또는 ‘십자가 신비주의’, ‘비관주의적 신비주의’ 라고 했으며 윤성법 교수는 ‘십자가 신비주의’, ‘그리스도 중심적 신비주의’ 라고 했으며 박봉배 교수 역시 ‘사랑의 신비주의’, ‘십자가 신비주의’, ‘열광적인 사랑의 신비주의’ 라고 정의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신비주의의 사랑’, ‘무차별적 사랑’ 이라고 말하고 그의 설교를 열광주의적 신비주의의 혼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평한다. 바로 이용도 목사는 이와같은 특징과 성격을 가지고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가 어떠한 특징과 성격을 가지고 부흥운동을 했으며 그 차이점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 분석해 보았다. 이들의 부흥운동은 각자가 혁혁한 차이를 보이는 상황속에서 일어난 운동이었다.
   
 B. 시대적 흐름의 구분에서 보이는 차이점

우리는 위에서 부흥회의 특징과 성격에 있어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가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석해 보았다. 이러한 차이점과 독특한 경향은 또다른 차이점을 형성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부흥회가 진행되었던 시대적 흐름의 구분에서 보여지는 차이점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에 맞추어 그 시대의 적합한 인물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 나가시는 분이시다. 우리 한국교회의 부흥운동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민경배 교수는 “조선교회의 부흥회는 길선주(吉善宙, 1869̴1935)의 제1기와, 김익두(金益斗, 1874̴1950)의 제2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라고 그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시기를 구분하고 있으며 김익두 목사 이후에 나타나게 된 이용도 목사의 부흥회에 대하여도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시련과 오해 속에서 이렇듯 신앙의 불길을, 좌절되고 혼미해 있는 군상들에게 타오르게 해 주었던 김익두의 부흥회가 멈칫한 1930년대, 그 자리를 경건의 새 박력과 영감의 능력으로 채워간 한 성도가 있었다. 이용도(李龍道)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이처럼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은 그 특징에 있어서의 차이점 뿐만이 아니라 그 부흥운동의 시대적 구분에 있어서도 차이점을 보인다. 민경배 교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김익두 목사를 언급하면서 계속하여 시대적 구분을 주장하는 근거를 서술하고 있다.
김익두(1874̴1950) 목사는 한국교회가 낳은 위대한 세계적 부흥사였으며, 기도 치병의 기적(奇蹟)을 수행하였던 능력의 기도인이었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사에서 그 제 1기는 대개 길선주(吉善宙, 1869̴1933) 목사가 활동하던 시기를 망라하고 있고, 그 제 2기는 김익두 목사 활동기, 그리고 제 3기는 이용도(李龍道, 1901̴1033) 목사나 임종순(林鍾純, 1875̴1947) 목사 및 정남수(鄭南洙, 1895̴1965) 목사, 그리고 제 4기는 1950년대 중반의 부흥운동, 제 5기는 1970년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각각의 시기와 부흥운동이 끼친 영향력에 따라 시대를 제 1기, 제 2기, 제 3기로 구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한국교회에 있어 초기 1907년을 지나서 1920년대와 1930년대로 흐르는 부흥운동이 길선주 목사의 제 1기 부흥운동에서 김익두 목사의 제 2기 부흥운동에로, 그리고 김익두 목사의 제 2기 부흥운동에서 이용도 목사의 제 3기 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이 부흥운동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각각 새로운 한국교회의 변화를 구축하게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가장 위대한 한국 개신교 인물 중에 한사람” 으로 평가 받고 있는 길선주 목사는 최초로 부흥운동의 불을 지핀 사람이요, 토착적이고 독특한 한국만의 특징라 할 수 있는 이른바 ‘조선신학’ 의 창시자로 불리울 정도의 목사였다. 선교사와 길선주 목사의 협력하에서 이루어진 한국의 초기 부흥운동은 17, 18세기의 독일 경건주의 운동과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 그리고 미국의 대부흥운동으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다. 초기 한국의 선교사들은 영미쪽이었으며 신앙은 경건하고 개인주의적이었다. 길선주 목사 부흥운동의 3가지 요소는 첫째가 파괴된 영혼에 의한 실패의식에서의 회복이고, 둘째는 외부로부터의 메시지를 통해 영적소망을 고취하는 것이며, 세째는 이것을 통하여 선교사들이 한국의 부흥을 꾀하는 동기가 되게하는 것이었다. 길선주 목사의 부흥운동에서는 한국인이 기독교의 진리에 대하여 처음으로 참다운 경험을 하게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한국교회의 양적성장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보였다. 또한 “이제 한국교회는 깨끗이 씻겨지고 달고 새로운 것이 되었다.” 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한국교회의 발전기틀을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으며 평양의 선교사들과 장로교, 감리교 양교파의 연합운동을 통하여 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는 면에서 그의 부흥운동을 제 1기 라고 평할 수 있겠다. 감리교의 존스(G. H. Jones)박사는 “이 위대한 사건으로 해서 한국민족교회의 정신적인 역사가 출발하였고 한국교회는 그 나름대로의 특징을 소유하게 되었다.” 라고 말했다. 이러한 신앙적 분위기에 힘입어 1895년부터 1907년 사이 교인수의 증가를 보면 1907년 평양의 인구 약 3분의 1의 수(약 14,000명)가 교회에 참석하였다. 당시까지의 한국교회는 내면적인 뜨거운 신앙경험이 적었고 다만 외형적인 서구문명과 그 사상으로서의 기독교만을 수용하고 있었으며, 특히 민족이 위기에 봉착해 있을 때 민족을 구할 외면적인 힘을 기독교로부터 얻고자 하는 복합적인 목적이 기독교 입신자들에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한국교회에 절실히 요구된 것은 내면으로부터 형성되는 기독교의 본질적 체험, 즉 죄로부터 참회와 구원에 대한 소망, 어떠한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섭리신앙을 체험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길선주의 부흥운동은 그 당시 한국교회의 필연적인 요구사항에 맞추어 하나님이 예비하신 시대의 시대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부흥운동이 길선주 목사에 의하여 비롯되었지만 이는 그의 인위적인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운동은 아니었다. 이 부흥운동은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섭리하시고 역사하신 성령의운동이었고, 이 부흥운동을 통하여 한국교회는 비로소 민족교회로서의 틀을 잡아가게 되었으며, 여기서 얻은 영력으로 앞으로 나가야 하는 수난의 가시밭길을 헤쳐 나갈 힘을 비축하게 된 것이다. 1907년의 부흥운동은 서양의 도로 알려진 기독교가 한국의 문화적 전통 속에 그 뿌리를 내린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것은 한국적인 신앙의 유형을 형성케 했고, 민중의 신앙유형이 되었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에게 와서는 그 상황이 달라진다. 한국의 초대교회가 길선주 목사의 부흥운동을 통하여 터가 잡혔던 상태에서 3.1 운동을 전후하여 자유주의 신학사조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쓸려 위기에 봉착하게 되자 한국교계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낸 사자가 김익두 목사였다. 1907년 부흥운동 이후 구형된 신앙의 내면화가 가속되면서 복음전도와 부흥회를 통하여 교회가 그 정체성을 확립한 1920년대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신앙의 분위기는 보수적이며 개인의 회심에만 집중하는 양상이었다. 1920년대 한국사회가 경험하는 사회변화의 위기는 공산주의로 대표되는 사회사상의 변화와 궁핍화로 치닫는 경제현실이라는 두방면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김익두 목사는 3.1운동 실패 후에 사회주의자의 등장과 무신론자들의 도전, 정치적인 황폐와 교회의 침체,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이 고개를 드는 시대적 위기 속에서 신앙의 회의와 의심이 강할 때에 확실하고 눈에 보이게끔 분명히 증거해 보이는 기적의 신유은사로 부흥운동을 진행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부흥운동과 차이점을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이때부터 시작된 김익두 목사의 이적과 기사의 신유집회에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밀려오기 시작했고 각색 병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받는 역사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김익두 목사가 문밖에 나가면 사람들은 신인(神人)의 얼굴을 뵈옵고자 좌우에 인성(人城)을 쌓고 병자들은 그 그림자라도 스치기를 소망했다. 한국교회사상 해방전까지 김익두 목사의 집회이상 많은 청중이 동원된 일은 없었다고 한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그의 집회에 오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은 깊은 좌절과 패배의식으로 고통을 받는 성도들에게 실증적(實證的)인 기적과 신유의 이적으로 그 시대를 갱생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부흥운동을 제 2기 라고 평할 수 있겠다.
반면에 1920년대 후반에 등장한 이용도 목사의 신비주의 운동은 기존의 종파 운동에서 나타났던 교회지향성을 극복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교계내에는 외국 선교사들이 전해준 전통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서 교회를 중심하여 적극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인물들이 교회속에 등장하여 민중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이용도 목사는 길선주 목사의 부흥운동에서와 달리 선교사의 영향력이 거의 사라져 가고 있을 때에 일어난 부흥운동이었다. 이용도 목사는 이전의 심령부흥운동과 달리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의 무교(巫敎)정서와 연결된 신비주의 종교운동으로 교회의 선교적 과제를 제기하고 해결방도를 내렸다는 점에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 1920년대의 교회는 격심한 사회 변화에 직면했다. 장로교는 이때가 문명의 창폐(敞弊)인 향락과 도덕의 부패, 윤리의 배역, 경제의 파멸, 사상의 타락, 학술의 황잡(荒雜)을 특징으로 하는 시대라고 비판을 했고, 감리교는 물질의 번영함을 종(從)하야 생활상 신법식을 도모하는 세대가 되었다고 개탄하였다. 또한 한국교회는 외적 제도와 조직에 몰입되어 가는 과정에서 교회안에 갈등과 반목이 성행했고, 지방색의 한계에서 나타난 교권분쟁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어지러움 속에서 이용도의 신비주의적 경건이 풍미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신비주의는 기록된 말씀과 설교, 제도적 교회와 신학전통을 무시하고 인간으로부터 신(神)에게로 올라가는 에로스 모티브(eros motif)를 중요시하여 개인의 영혼의 심저에서 들리는 성령의 내적 체험을 강조함으로써, 인간 밖에서 일어난 객관적 계시보다 인간의 내부에서 조명되는 빛을 우선시하였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안이 팽배할 때 신앙은 현실도피적 경향을 띠게된다. 이 민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다른 소종파 종교들이 그 영향력을 상실했을 때나 독립의식의 심각한 좌절감, 세계경제의 공황, 일제의 탄압과 농어민 수탈 등은 자연히 개인의 영혼구원에 대한 타계지향적인 신앙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은 교회가 이러한 사회 변화의 도전에 신음하던 때에 한국교회의 개혁과 자립을 위하여, 또한 기독교인들의 전통적인 영성의 토착화를 통한 신비주의 부흥운동회를 진행하였다는 점에서 그 시대적 차이점을 보인다고 하겠다. 또한 일제의 폭압에서 수모와 시련으로 형극의 길을 가는 교회의 비통한 정서에 구체적으로 그 아픔의 위로를 표현할 통로를 제공한 한국 교회의 예민한 음성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부흥운동이 경건과 보수주의 그리고 비정치화의 교회성격에서 민족주의, 진보주의 자유주의, 신비주의의 부흥회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1923년부터 내리막길에 있었던 전국의 교세를 1929년부터 1933년까지 계속 다시 올라갈 수 있도록 한 것은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이 기독교인들의 전통적인 영성을 회복케 한것에 기인한 것이었다. 감리교회의 웰치(H. Welch)목사는 한국교회의 기적적인 부흥성장의 근거로 이 백성의 신비성과 정서적인 성품을 들고 있는데, 이용도 목사는 이러한 면에서 한국적 신비주의 신앙운동의 창시자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인물로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평가에 의하여 우리는 그의 부흥운동을 제 3기 라고 주장할 수 있겠다.
우리는 위의 연구결과 이 세 부흥운동이 그 시기와 끼친 영향에 따라 시대의 흐름속에서 서로 다르게 구분되어진다는 차이점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각 시기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섭리 속에서 이 세 부흥목사들의 시대흐름의 분류와 차이점도 가능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이와같은 흐름은 인간을 구원하고자 역사하는 성령의 활동에 의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Ⅵ. 세 부흥운동의 공통점

  A. 세 목사의 개인적 중생(衆生)에 근거한 부흥운동

김명용 교수는 한국의 부흥운동을 언급하면서 “우선 한국 장로교회의 성령운동은 회개시키고 중생시키고 성화시키는 데 그 장점이 있다.” 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의 근저에는 그 부흥운동을 인도하였던 인도자들의 개인적 중생의 체험이 선행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위에서 보여진 몇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의 부흥운동 내면에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실존적인 만남을 통하여 생겨난 중생과 신생(新生)의 체험이 감동적으로 내재해 있었으며 그들의 부흥운동은 그때의 감격과 정열 속에서 진행이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중생의 정의를 성서적인 의미에서 서술한다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케리그마를 통해 그리스도와 만남으로 필사(必死)의 생을 뛰어넘는 것으로, 케리그마를 통해 사람은 죽음의 순간 종말론적 생명을 허락받게 되는데, 이 생명은 이미 이생 동안에 반복적으로 겪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결합은 자아의 끊임없는 기독교적 경험이다.
우리는 이러한 중생의 경험을 세계교회의 역사를 통하여서도 많은 인물들이 경험하였음을 알고 있다. 위대한 종교가나 개혁가에게는 개인에게 인생의 전환을 주는 회심의 체험이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요한 웨슬레(J. Wesley)는 중생이란 사랑, 겸손, 온유, 그리고 성실한 마음으로 변화되어 온 인류에 대한 이해관계로 초월한 마음으로의 변화라고 정의하면서 세속적이고 마귀적인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화되는것이라고 말하고 이러한 그의 견해는 중생의 본질을 내적인 변화로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약하면 중생이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하며 특히 진리의 말씀을 믿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어느 성령운동 또는 부흥운동이든 반드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인물들이 중생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체험한 후 그것에 근거하여 집회를 인도하고 설교도 하게 되며 그 시대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명자가 되는 것이다. 
중생이라는 말은 많은 논란의 여지를 가지고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는 의미있는 단어이다. 일반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인간의 돌이킴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돌이키는 것처럼 인식이 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성령님의 인도와 강권에 의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중생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사건이라고 할 때, 결국 중생이란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영적으로 살아났다는 의미이고 그 전제는 죽음이다. 즉 영적인 죽음으로부터 영적인 부활을 의미한다. 이미 영적으로 변화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데 중생을 통하여 영이 본질적으로 변화를 일으켜 하나의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형상은 외적인 형상뿐만은 아니다. 도리어 마음으로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고 “변화 후에 더 나아가서 씻기는 은혜와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에게 있어 하나님을 인격적이고 실존적으로 만나는 중생의 체험은 필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은 중생의 체험과 경험에 있어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도 역시 여기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길선주 목사가 많은 종교적 편력에 방황을 하던 중 마펫 선교사를 만난 뒤에 김종섭의 권유로 기도하였고, 바로 그때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중생의 경험을 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그의 생애를 요약하면서 살펴 보았다.
길선주 목사가 중생하는 경험에 대한 묘사와 그 광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은 그의 중생의 경험이 얼마나 그의 부흥운동에 큰 동기부여를 주었는지 알 수 있다.

“예수가 인류의 참구주인 알려 주옵소서.” 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옥피리 소리가 방을 진동하더니 요란한 총소리가 흔드는 소리에 선생이 깜짝 놀라는 순간, 공중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하고 세 번 부르는 소리를 듣고, 너무나 무섭고 떨려서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엎드린 자세대로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여, 제 죄를 사하여 주시고 저를 살려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였다. 그 때 비로소 마음이 터지고 마음이 열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아 방성대곡하였다.

이러한 길선주 선생이 보인 중생의 사건은 미국의 만국주일공과에 게재된 바 있으며 또한 독일의 어떤 교회학교에서는 이 이야기에 감동한 나머지 헌금을 보낸 일까지 있었다 이때의 경험 이후로 길선주 목사는 위대한 부흥사로서의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김익두 목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 그의 생애를 통하여 왓슨 선교사의 ‘영생’ 에 관한 설교를 듣고 그가 중생의 경험을 했다는 것을 살펴 보았다. 중생의 경험은 순간적이든 장기적이든 일단은 변화하는 것이며 그 변화자체는 명백히 종교적인 것으로 급진적 조명(illumination)의 도그마(dogma)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종교성장의 점진적 경험으로 부터의 점진적 단계이다. 그러므로 중생에 따른 파동(flutuation)은 인생시기의 거대한 부분을 통하여 일어나며 때로는 과오(backsliding)와 실수(lapses)를 통해서 일어나기도 한다. 안악산골의 깡패였던 김익두가 갑자기 행실이 바뀌어 변화되는 사건은 그가 하나님을 만나 경험한 개인적 중생의 체험이 없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가 1900년 7월부터 1902년 2월에 걸쳐서 순한문 신약성서를 100번 읽으리만큼 깊은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가슴을 칼로 찟는 것과 같은 성령의 불세례를 체험하고 중생의 체험을 경험한 것은 모두다 그의 거듭남의 증거로 나타난다. 깔뱅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반드시 과거 생활의 과오(errors)를 버리고 바른 길(right way)로 돌아서며 회개(repentance)를 실천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고 말하며, 계속해서 “그러므로 나는 회개를 중생이라고 해석한다. 회개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지고 거의 도말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안에 회복시키는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중생의 경험에는 반드시 회개가 수반된다. 회개와 중생은 일치하는 것이며,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전향이고 이것은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다. 곧 회개를 통한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 중생의 목적인 것이다. 이와같이 김익두 목사도 회개를 통한 중생의 경험을 하였는데 그는 세례를 받은 날 그의 과거 불신(不信)시대의 생활과 죄악스러운 행위를 참회하며 시종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고 한다.
    이용도 목사 또한 기도 가운데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는 중생의 경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1928년 12월 24일 새벽의 신비적 영적체험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의인의 은총과 더불어 받는 중생의 은총은 하나의 현실이다.” 이용도 목사 또한 신비적 체험 가운데 현실 속의 사건을 경험하면서 그의 중생체험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 날도 평상시처럼 기도에 몰두하고 있을 때 새벽 3시에 비몽사몽간에 하나의 이적을 보았다. 그의 발에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큰 발이 둘이나 달렸으며, 시커만 몸뚱이며, 수족에는 삼지창 같이 검고 날카로운 손톱이 있는 괴물이 딱 버티고 당장 용도에게 달려들려고 하고 있었다■■그는 이 괴물들과 싸웠다. 그리고 물리쳤다. 그러나 한 마리가 통천시내로 가더니 예수를 믿다가 낙심하여 쉬는 유사집에 가서 마루턱에 앉아서 아이들을 가르키며 “누구를 잡아갈까?” 라고 하였다. 용도는 온식구를 깨우면서 “사탄아! 나가라!” 하고 외쳤다. “하나님의 자녀는 한 사람도 해치지 못하리라!” 고 하니 비로소 악마는 집에서 나갔다. 그는 그날 아침에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부터 용도는 전날의 용도가 아니었다.
이처럼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이 그 인도방식과 특징에는 많은 차이점을 보였으나 그들의  근본적인 중생의 경험과 그 부흥운동의 시발점은 하나님과의 실존적인 만남의 경험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에서 그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다. 하나님과 만났던 그 중생의 감격과 그 기쁨을 부흥운동을 통하여 신도들에게 알렸던 것이다.

  B. 일제하에 복음적 소망을 심어준 부흥운동

게럴드 케네디(G. Kennedy) 목사는 “우리 목사들이 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실의에 빠진자를 고쳐주고 두려워 하는자에게는 확신을 심어주는 위로와 소망과 치유의 메시지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우리가 지금 살펴보는 세 목사들을 통하여 변함없이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에서 보여지는 또다른 공통점으로는 이 모든 부흥운동이 일제하의 정치적 억압의 상황에서 고통받고 있는 민족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전해주고, 동시에 그 당시의 진통과 어려운 상황을 세속적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고 오로지 복음의 소망으로 해결하도록 이끌어갔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이 세 명의 목사들의 부흥운동에서 보여지는 공통점은 다른 세속적 방법으로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려 하지않고 오로지 신앙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줄기치게 한국의 강점을 획책하던 일본은 1904년 8월 드디어 제1차 한일조약을 체결하였다. 바야흐로 소위 고문(顧問)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일제의 한국통치는 사실상 러■일 전쟁을 위해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던 1905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27년 북장로교회 선교사 폴리아드(Pollard)는 이 당시의 한국교회의 암울한 상황을 묘사하면서 “한국교회의 영적 손실이 가장 컸던 시대”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일제강점의 시기에 주님의 사역자를 준비해 놓고 계셨던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억압을 ‘폭력적 혁명’ 에 의해서 풀어 나가야 한다는 맑시즘에 입각한 공산 혁명적 방법이나, 제 3세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해방신학’ 의 방법으로 풀지 아니하고, 신 앞에서 경건을 가다듬고, 이 신앙을 먼저 내연시켜 외연으로 향하려는 부흥운동의 방법으로 이를 타개하려 하는 방법론적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길선주 목사의 경우는 1907년에 정미조약이 맺어지고 이로 인하여 많은 백성들과 신도들이 방황하며 분노하고 슬퍼할때에 다른 방법이 아닌 말씀과 기도로 이 어려운 일제치하의 여건을 이겨내고 교회가 크게 성장하는 밑거름을 비축하기 위해 힘쓴 목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길선주 목사의 1097년의 대부흥운동을 ‘몰역사화’ 또는 ‘비정치화’ 하게 하였다는 부정적 견해도 있으나 김인수 교수는 그러한 견해에 대하여 반문을 하며 길선주 목사의 대부흥운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변호하고 있다.
부흥운동이 한국 교회를 몰역사화, 비민족화했다는 평가도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비록 무력항쟁에 앞장 서지는 않았다 하더러도 참 그리스도인은 민족의 고난이나 국가 독립의 상실에 결코 무관심하거나 외면할 수 없다■■따라서 민족이 고난에 처했을 때 항상 기독교인이 앞장을 선 사실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1907년의 부흥운동은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섭리하시고 역사하신 성령의 운동이었고 이 운동을 통해 한국 교회는 비로소 민족교회로서의 틀을 잡아 나가게 되었다.  
분명히 길선주 목사의 부흥회는 일제의 강점이 시작되던 시기에 나라와 민족의 어려움과 그 위기를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고 복음적인 입장에서 말씀과 기도로 승리하였던 부흥운동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 후에 민족적 존폐위기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은 오로지 하나님께 의지하며 매달리는 것 뿐임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자면, 특히 이러한 부흥운동은 1907년 새학기를 맞이하여 전국의 각지에 있는 학교로 확산이 되어 숭덕 학교에서는 300여명의 학생들이 회개와 통회를 하게 되고 숭실대학의 학생들 90%가 중생을 체험하였으며 평양신학교 학생 75명은 3개월간 계속된 저녁시간의 부흥집회에서 큰 은혜를 받았다. 또한 말씀과 말씀에 이은 회개의 경험적 요소가 균형있게 이루어진 사경회 중심의 부흥운동이었다. 길선주 목사가 대부흥운동을 통하여 보여준 것은 개인적인 고독감과 국가의 위기를 생각할 때 엄습하는 불안감을 한국인으로 하여금 교회에서 새 소망을 얻도록 유도하였고 동시에 교회로 하여금 한국인의 이러한 심리적 불안을 간파하고 전도에 힘쓰도록 한 것이었다.1919년 3.1운동으로 2년여의 옥고를 치루고 나온 이후 길선주는 ‘말세지말(末世之末)’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즉, 후기의 길선주는 목회자이며, 부흥가이며, 성경학자이며, 민족운동가로서의 삶을 종말론적 지평 위에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임박한 종말과 심판, 주의 재림, 천년와국에 대한 소망, 이것이 3.1운동 이후 그의 삶과 신앙, 그리고 설교의 핵심이었다. 그의 말세신앙은 절망의 현실 속에 신음하던 민중의 힘이 되었고 일제의 탄압에 끝까지 저항하는 민족 신앙의 에너지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김익두 목사의 때로 나아가면 더욱더 확실해진다. 민경배 교수는 그를 그 시대의 예언자요, 목자로 지목하고 있다. 김익두 목사는 3.1 운동이 실패 이후 복잡한 실망과 패배심리 속에서 아픔과 좌절을 겪고 있을때 그 중심을 뚫고 솟는 샘물처럼 등장하여 겨레와 교회에 힘과 활력이 되살아나게 하였던 역사적 지도자요, 1920년대부터 파급되기 시작한 새로운 사상적 격동과 사회적 갈망, 그리고 지적 회의주의와 반기독교적 이데올로기의 격류에 맞서 신앙의 정통성을 고수하고 소외되어 있는 하층민에 호소통로를 찾아 일찍이 우리 근대사에 경험하여 보지 못하였던 민중초근(民衆草根)이 침투케 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김익두 목사는 신유의 은사를 통하여서 신도들을 위로하고 치유하였는데 와그너(C. P. Wagner)의 정의대로 신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연적인 인간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건강을 회복케 하시는 중개자로서 사람에게 봉사하는 능력이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김익두 목사가 행한 신유의 은사는 육체적인 질병에만 국한시키는 곳 보다는 정신적인 병과 고통, 좌절, 그 외의 영적인 병까지 치료한 사역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주승중 교수는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분석하면서 전체 설교 가운데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설교가 38%나 차지 할 정도로 많다고 설명하면서 김익두 목사는 이러한 치유의 사역과 설교를 통하여 슬픔과 고난의 좌절 속에 헤메이던 이 민족에게 구원과 확신을 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스테판 힐(Stephen Hill)은 “질병은 사단으로부터 주어진 비극의 씨앗이며, 사단의 작품이며, 죄의 결과로 이 땅에 생겨난 것이다.”라고 질병의 본질을 설명하였다. 일제치하에서 보여진 김익두 목사의 치유사역은 이러한 사단의 굴레를 벗기어 주는 열쇠였던 것이다. 라드(G. E. Ladd)는 신유를 설명하면서 “ 하나님 나라는 본질적으로 사단 나라와의 전쟁과 정복이며 신유와 병고침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며 사단의 속박에서 사람들을 구원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김익두 목사는 사단의 장난으로 인정받던 일제시대의 고통과 어려움을 신유의 능력으로 해소시키며 한국교회 위에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건설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용도 목사 또한 일제의 강점하에서 신비주의적인 부흥집회를 통하여 민중들을 복음의 소망에로 이끈 인물이다. 이용도에게 영향을 미쳤던 신비주의 영성의 큰 흐름은 어거스틴주의(Augustinian)로 이를 완성한 버나드(Benard), 프란시스칸(Franciscan),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등 중세 신비주의 및 독일 신비주의를 거쳐 루터(Martin Luther)에 이르고 있다. 잉그(Inge)는 그의 책에서 40여개의 신비주의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이것은 신비주의를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종교는 없다. 일반적으로 신비주의 운동은 신비적인 체험을 동반하게 되는데 신비체험이란 시간에 의해 연결된 삶이라는 맥락 속에서 시간이 없음을 보는것이며, 또는 그들의 궁극적 환경 속에서 무한한 것과 영원한 것 모두를 보는 것을 의미하며, 이성과 감각이 결론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을 그 체험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우리 앎의 방식이다. 일본의 교회박해는 강압과 위협, 회유와 유혹등 온갖 수단이 동원되었는데 이러한 교회강압과 사회불안은 처음과는 달리 한국교회의 성경교육과 신학의 부재를 부채질하고 말았다. 신학적 기반이 없는 나약한 신앙이 현실부정의 혹독한 고난에 직면할 때 피 할 곳은 내세의 천국에 대한 소망과 신비주의 체험 밖에  없었다. 일본의 극심한 교회 탄압의 비극은 한국인의 종교감정속에 인간상실, 민족의식 상실의 위기를 가져왔고 따라서 기독교회는 서구의 경우와는 달리 신앙의 철저한 내면화와 경건회를 가져왔다. 이 시대속에 기댈 소망의 근거는 없었으며 한국교회 신앙의 형태는 신비주의로 기울어져 갔다. 이 시기에 이용도 목사의 사랑의 신비주의 부흥운동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이것은 교회의 형식화와 교권의 창설에 매서운 비판을 가했던 당시의 전형적인 경건의 한 모델이 되고 있다. 폴 틸리히는 “신비주의 운동이란 왜곡된 성례 및 제사 일체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일체의 유한한 권위주의적인 거침돌들을 거두어 내고 인간 심령이 하나님에게 직접 접촉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인간형성의 비판정신의 출발점” 이라고 말했다. 언더힐(E. Underhill)은 “신비주의는 철학도 아니며, 지식도 아니고, 단순한 묵상도 아니며,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성취시키는 삶의 본질이다”라고 정의하며 “이것은 절대자와의 합일을 추구하고 그 방법은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일제의 치하에서 이루어진 이용도 목사의 부흥회는 이 과정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신비주의는 체험에서 출발하여 그 체험을 사회화하고 다시 그 사회성은 그의 신비주의적 성품 안으로 내면화하는 변증법적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용도의 신비주의는 이전의 종파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일제하 상황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도 일제치하에서 고통받는 민중을 복음의 소망으로 이끄는 주도적인 사랑의 움직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용도 목사를 시작으로 영향력을 지니게 된 한국교회의 신비주의운동은 일제치하에서 방향성을 잃어버린 우리민족에게 위로와 소망을 보여주었다. 절망과 목적의식을 잃은 민족적 아픔의 현장에서 이용도의 신비주의 부흥운동은 성도들의 믿음을 일깨워 주었으며 묵시론적인 소망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는 일제시기의 암울한 시대에 오로지 복음의 소망을 향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부흥운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Ⅵ.결론

   A. 요약

우리는 이때까지 한국교회의 역사에 있어 큰 획을 남겼던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에 대한 이해를 서술하였고, 아울러 그들의 부흥운동에 대한 상호비교분석을 차이점과 공통점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우선 제Ⅰ장의 서론에서는 본 연구의 목적과 앞으로 전개하게 될 연구내용의 방법과 그 범위에 대하여 설명을 하였으며 부흥운동에 대한 성서적인 이해까지 간략하게 살펴 보았다.
제Ⅱ장의 길선주 목사 부흥운동에 대한 이해에서는 그의 생애를 출생부터 기독교 입신 전까지, 기독교 입신에서 1907년 대부흥운동 전까지, 1907년에서 임종의 때까지로 나누어 살펴 보았고, 그가 부흥운동을 행하였던 시대적 배경을 정치적, 사회적, 기독교적 배경에서 고찰하였다. 길선주 목사가 보인 부흥운동의 특징은 사경회를 통한 말씀 중심의 부흥운동이며 기도회를 통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성령운동이었고 특히 말세학 강연을 통한 신앙의 고취를 목적으로 하는 부흥운동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부흥운동에 대한 평가를 긍적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으로 나누어 살펴 보았다.
제Ⅲ장의 김익두 목사 부흥운동에 대한 이해에서는 그의 생애를 출생부터 기독교 입신 전까지, 기독교 입신부터 기독교도 연맹 가입 전까지, 기독교도 연맹 가입부터 임종 때까지로 나누어 설명하였고, 그가 행하였던 부흥운동의 시대적 배경을 1920년대부터 1930년대의 어간으로 잡고 사회적 배경과 기독교적 배경으로 나누어서 알아 보았다. 김익두 목사 부흥운동의 특징은 신유은사를 통한 병고침 중심의 부흥운동이었으며 소외계층을 중심으로한 대규모적 부흥운동이었음을 언급하면서 김익두 목사의 평가 또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았다.
제Ⅳ장의 이용도 목사 부흥운동에 대한 이해에서도 그의 생애를 가정환경과 어린시절, 학창시절과 투옥생활, 협성 신학교 시절, 목회와 부흥사 시절부터 임종때까지로 나누어서 살펴 보았다. 그리고 시대적 배경을 사회적 배경, 기독교적 배경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고, 이용도 목사가 보인 부흥운동이 신비주의적 영적 체험에 기초한 부흥운동과 예언자적 활동에 기초한 부흥운동이었음 피력하였다. 그의 평가 또한 긍정적이며 부정적인 면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았다.
제Ⅴ장의 이 세 부흥운동의 차이점에서는 세 목사의 부흥운동이 보여준 특징과 성격에서 나타난 차이점과, 시대적 흐름의 구분에서 나타난 차이점으로 나누어 살펴 보았다.
제Ⅵ장의 이 세 부흥운동의 공통점에서는 세 목사의 부흥운동이 그들의 개인적 중생의 체험을 기초로하고 있다는 점과, 일제시대에 오로지복음의 소망을 가지고 살도록 이끌었다는 점을 동일한 맥락에서 연구하였다.

   B. 발견점과 연구의 결과

우리가 본 논문을 통하여 발견한 몇가지 내용을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그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인물을 통하여 그 역사의 예정과 성취의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이다. 깔뱅(J. Calvin)은 그의「기독교 강요」에서 “선택된 자들은 실제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편입된다.” 라고 말하면서 역사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예정과 성취의 계획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국에 기독교적 기틀과 부흥을 이루시기 위하여 1907년에 길선주 목사를 택하셔서 한국교회 기독교의 출발점을 삼았으며, 일제하의 고통에서 또다른 철학사조와 시대적 분위기로 인하여 신앙의 퇴보를 보이는 시대에 김익두라는 목사를 택하셔서 신유를 통한 확실한 부흥의 기반을 다지게 하였고, 그 후로 기존의 교회형식과 부패를 가슴아파하며 영적인 목마름을 갈구하던 시대에와서는 이용도 목사를 택하여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여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모든 부흥운동은 그 부흥운동을 주도하는 인도자와 지도자가 성령을 통한 개인적인 중생과 확실한 거듭남의 체험 그리고 깊은 신앙생활을 경험하고 그 가운데서 일어난 하나님과의 교제와 만남을 기초로 그 부흥운동을 이끈다는 사실이다.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 그리고 이용도 목사 모두다 깊은 신앙의 체험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났으며 그것이 각 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되었고 동기유발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각 부흥운동의 특징이 나타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시대에 맞추어 인물을 선택하여 세우시고 그 사람에게 중생의 은혜를 더하여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할 때에는 항상 그 인물에게 특이한 은사와 특징을 더하여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별한 은사들은 성령에 의하여 전체교회를 대신하여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개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길선주 목사는 특별하게 사경회를 통하여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와 새벽기도회를 창시할 영적인 성숙함을 은사로 가지고 있었으며, 김익두 목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질병을 치유하는 신유은사를 지니고 있었고, 이용도 목사는 신비한 영적체험을 통한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남다른 은사를 보였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사명자에게 소명도 주시고 감당할 수 있는 은사도 주시는 것이다.
넷째, 우리 초기 한국교회의 신앙조류는 이 세 부흥운동을 기초로하여 각기 장점과 단점, 차이점과 공통점을 가지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씀과 기도중심으로 인도한 길선주 목사의 부흥운동은 지금도 우리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특징이 되고 있으며, 김익두 목사의 신유은사를 통한 이적도 현재 한국교회의 특징이며, 특히 이용도 목사의 신비주의도 후대 한국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물론 각각의 부흥운동이 서로 분명한 차이점과 동시에 동일한 면도 있으나 이 모든 것들이 서로의 자리를 찾아가며 우리 한국교회에 전반적인 성향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과거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그것을 비교분석한 결과에서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은 한국을 복음의 중심지로 삼기 위하여 일어난 하나님의 계획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초기 한국교회의 특징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하는 부흥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이 보여준 말씀과 기도, 신유의 은사와 병고침, 신비주의로 향하는 신앙의 색깔은 지금도 한국교회의 구석구석에 살아 숨쉬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영향력은 쇠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보여준 이러한 은사들과 특징있는 신앙의 전통을 어떻게 현재에 되살려 재적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며, 21세기를 향하는 우리에게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다가올 21세기를 감당할 수 있는 은사와 능력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은사라는 것은 수여받고 선물받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린(M. Green)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를 통하여서 우리는 이 시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은사야 말로 우리 삶속에 하나님의 실재와 능력이 함께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깨닫게 한다”고 말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는 역사 속에서 보여진 과거의 교훈과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야 할 것이다. 시대를 인식하고 그 시대에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이 무엇이며 그 뜻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우리가 준비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일제치하에서 나라를 빼앗긴 설움에 울던 백성들에게 내일에 대한 소망을 제공하고 고난 속에서 하늘을 향해 두 손 들고 애원할 수 있는 믿음과 비전을 제공해준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는 이 민족과 울고 웃었던 가장 친근한 우리의 신앙의 선배이자 하나님의 사도였다. 이제 한국교회는 21세기의 새 시대를 맞는 문턱에 서 있고 선교 2세기에 접어든지 이미 10여 년이 지나고 있다. 과거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을 통하여서 현재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사명은 민족과 국가의 갈 길을 바로 제시해 주는 것이며 올바른 신앙관과 역사관과 가치관 그리고 시대적 사명을 올바로 자각케 함으로써 민족의 의식과 문화속에 깊이 뿌리박아 기독교가 참된 의미의 우리 민족종교가 되도록 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힘쓰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의 신앙과 생애 그리고 그들의 부흥운동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이 되며 이것에 대한 더욱더 깊고 밀도있는 상호비교분석연구가 앞으로 계속되어야 할 것을 언급하며 본 논문의 최종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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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내 학위논문

김동익. “韓國敎會의 聖靈運動 考察.” 미간행 신학석사학위논문, 장                 로회신학대학 대학원, 1996.
김상희. “한국교회 부흥운동에 대한 성경적, 역사적 고찰.” 미간행                 신학석사학위논문, 총신대학교 대학원, 1984.
김석범. “중생과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 대한 연구.” 미간행 신학                 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 1996.
김지덕. “이용도 목사의 신학사상.” 미간행 신학석사학위논문, 장로                 회신학대학 대학원, 1997.
김정환. “부흥운동과 회심.” 미간행 신학석사학위논문, 고려신학대                 학 대학원, 1996.
朴光熙. “李龍道의 시무언(是無言)에 나타난 영성연구.” 미간행 석                  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1993.
박치우. “중생과 성결의 관계에 대한 연구.” 미간행 신학석사학위                  논문, 서울신학대학 대학원, 1996.
裵弘一. “靈溪 吉善宙 牧師의 生涯와 思想.” 미간행 신학석사학위                  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1995.
손학풍. “한국교회 부흥회와 교회성장의 관계에 대한 연구.” 미간                  행 목회학박사학위논문,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                     1987.
李相得. “吉善宙, 李龍道의 復興運動 比較硏究와 이 運動이 民族敎                  會形成에 미친 影響.” 미간행 신학석사학위논문,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 1985.
이석영. “1907년 한국교회 부흥 발전의 원류.” 미간행 신학석사학                 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 1990.
이용규. “신유사역의 이론과 실제에 관한 연구.” 미간행 목회학박                 사학위논문, 서울신학대학 대학원, 1994.
李哲信. “韓國初期 長老敎의 査經會에 關한 한 硏究.” 미간행 신학                 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 1986.
유영기. “한국교회 부흥운동과 부흥사들의 설교에 관한 연구.” 미                 간행 신학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 1998.
柳傳明. “韓國敎會 復興運動에 關한 硏究.” 미간행 신학석사학위논                 문,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1984.
柳政佑. “칼빈의 救援論에 나타난 善行의 位置와 重要性.” 미간행                 신학박사학위논문,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 1998.
윤정길. “한국강단의 설교변천에 관한 연구.” 미간행 신학석사학위                 논문, 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 1988.
張圭熱. “韓國敎會의 神秘主義와 그 影響에 關한 硏究.” 미간행 신                 학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 1991.
장임철. “성서를 통해서 본 질병과 치유.” 미간행 신학석사학위논                 문, 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 1990.
정현재. “1920년대 한국교회의 사회의식 연구.” 미간행신학석사학                 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 1990.
진상원. “1907년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역사적 이해.” 미간행 신                 학석사학위논문, 고려신학대학교 대학원, 1993.
朱承中. “韓國敎會 殉敎者들의 說敎內容과 思想에 關한 硏究.” 미                 간행 신학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 1987.
최덕성. “1907년 대 부흥운동의 역사적 이해.” 미간행 신학석사학                 위논문, 고신대학 대학원, 1993.
최 석 . “이용도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연구.” 미간행 신학석사학                 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1988.
최재홍.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령운동에 대한 고찰.” 미간행 신학                 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 1992.

3. 국내 학술월간지

김진택. “敎會成長과 聖靈의 役事-사도행전을 중심으로,”「神學指                  南」제43권 2집 (1976. 6): 85~93쪽.
김철손. “韓國敎會의 神秘主義와 그 影響,”「풀빛목회」제36권                     (1983. 11): 57~73쪽.
신광철. “민족적 실의 극복한 이적의 사도 김익두 목사,”「牧會                   와 神學」제84호 (1996. 6): 196~198쪽.
손두환. “웨슬리와 復興運動,”「基督敎思想」(1978. 9): 50~61쪽.
송길섭. “한국교회의 개혁자 이용도,”「神學과 世界」제4호 (1978):                 124~57쪽.
이종성. “復興運動의 신학적 근거,”「基督敎思想」(1998. 9): 40~                 48쪽.
장병일. “復興運動의 횃불,”「基督敎思想」(1996. 12): 71~77쪽.
전동식. “初代敎會 復興運動史 考察,”「月刊牧會」(1981. 1): 44~                  48쪽.
주재용. “李龍道와 神秘主義의 시대적 배경과 그 평가,”「基督敎思                 想」(1985. 7): 152~166쪽.
      . “韓國敎會 復興運動의 史的批判,” 「基督敎思想」(1978.                    9): 62~72쪽.
한제호. “基督敎의 神秘槪念,” 「神學指南」제43호 4집 (1976. 12):                  54~63.

B. 번역서적

Calvin, J.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Vol. Ⅲ. 편집부                    역,「영■한 기독교 강요」Ⅲ. 서울: 기독 성문출판사,                    1993.
Clark, C. A. Korean Church and Nevius Methods. 박용규■김춘                  섭 공역,「한국 교회와 네비어스 선교 정책」. 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94.
Clinton, J. R. The Making of a Leader. 이순정 역,「영적 지도자                  만둘기」. 서울: 베다니 출판사, 1993.
Ellwood, R. S. Mysticism and Religion. 서창원 역,「신비주의와                  종교」. 서울: 이화여대출판부, 1994.
Hilther, S. Preface to Pastoral Theology. 민경배 역.「목회신학                  원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7.
McGavran, D. Understanding Church Growth. 전재옥■이요한■                  김종일 공역.「교회성장이해」.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3.
Niesel, W. Die Theologie Calvins. 이종성 역.「칼빈의 신학」. 서                  울: 대한기독교서회, 1991
Oden, T. C. Pastoral Theology. 오성춘 역.「목회신학」. 서울: 한                  국장로교출판사, 1996.
Pink, A. W. The Holy Spirit. 지상우 역.「성령론」. 서울: 도서출                  판 엠마오, 1992.
Smylie, J. A Brief History of the Prebyterians. 김인수 역.「간                 추린 미국장로교회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Walker, W.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강근환 외 편역.                「세계기독교회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C. 외국서적

Barnes, H. E. A History of Historical Writing. New York:                      Dover Pub. Co., 1936.
Baxter, J. S. The Divine Healing of the Body.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79.
Bernheisel, C. F. "Rev. Kil, Sunju," The Korea Mission Field                   (February 1936).
Boggs, Wade. Faith Healing And the Christian Faith.                            Richmond, VA: John Knox Press, 1956.
Bounds, E. M. The Reality of Prayer. Chicago: Moody Press,                    1980. 
Bouquet, A. C. Religious Experience. Westport: Connecticuti                    Greenwood Press, Publishers, 1968.
Brown, R. E. The Gospel of John. New York: Doubleday and                   Company, 1966.
Carr, E. H. What is the History? Cambridge: Pelican Books,                    1970.
Carter, R. Kelso. The Atonement for Sin and Sickness. Boston,                  MA: The Christian Witness, 1884.
Clark, C. A. The Korean Church and the Nevius Methods.                      New York: Fleming H. Revell Comany, 1930
Clark, W. H. The Psychology Religion. New York: Macmillian                  Co., 1985.
Downer, A. H. The Mystical Theology of Saint Bernard. New                   York: Sheed and Word, 1915.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Grand Rapids, Michigan:                       Fourteenth printing, 1990.
Frankl, V. E. The Doctor and The Soul. New York: Alfred A.                  Knopf, 1966.
Giffiths, Michael. Grace - Gift. Grand Rapids: Eerdmans, 1978.
Green, M.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Grand Rapids: W. B.                    Eerdman Publishing Co., 1975.
Harkness, Georgia. Mysticism. Nashville: Tennesse Abingdon                   Press, 1973.
Hill, Stephen. Healing is Yours. Harrison: New Leaf Press,                     1984.
Hurding, R. F. The Tree of Healing. Grand Bapids, MI:                        Zondervan, 1985.
Ikin, A. Graham. New Concepts of Healing. New York: Harper                  and Row, 1956.
Johnston, William. Christian Mysticism Today. New York:                       Harper and Row, 1984.
Jones, E. S. Conversion. New York: Abingdon Press, 1952.
Kelsey, M. T. Encounter with God : A Theology of Christian                    Experience. Minneapolis, Minn: Bethany Fellowship,                    1972.
Kennedy, Gerald. His word Through Preaching. New York:                      Haper and Brothers's publishers, 1947.
Ladd, G. E. The Gospel of the Kingdom. Grand Rapids, MI :                   Eerdmans, 1959.
Lowith, Karl. Meaning in Histor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2.
McIntire, C. T. ed. God, History, and Historia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77. 
Paik, L. G.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                    ~1910. Seoul: Yonsei University Press,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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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hner, K. The Practice of Faith. London: SCM, 1983.
Rice, J. R. Prayer - Asking and Receving. Murfreeboro, T. N.                  : Sword of Lord Publlishers, 1970.
Simpson, A. B. The Gospel of Healing. Harrisburg, PA:                          Christian Pub. Inc.,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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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h, K. S. The Korean Minjung in Christ. Hong Kong: The                    Christian Conference of Asia,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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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rey, R. A. Divine Healing. Grand Rapids, Michigan:                          Michigan Book House, 1974.
Trench, R. C. Note on the Miracles and the Parables of Our                   Lord. Westwood, N. J. : Fleming H. Revell Co., 1970.
Underhill, E. Mysticism. N.Y.E.P: Dutton and Co., 1961.
Wagner, C. P. Your Spiritual Gifts can Help Your Church                      Growth. Glendare: G/L Publications, 1980.
Wallace, R. S. Cavin's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 Michigan:                   Grand Rapids, Wm. B. Eerdmans, 1961.
Welch, H. The Missonary Significance of the Last Ten Years :                  A Survey in Korea. 11 vols. Edinburgh: The                           International Review of Misstons, 1922.
Wilkinson, J. Health and Healing. Edinburgh: Handsel, 1980.
Wimber, John. Healing. Paster John Wimber Vineyard Christian                  Fellowship Series. vol. Ⅱ. New York: Vineyard                        Ministries International, 1962.
Won, Jong-Chun. Communion with Christ.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89.

D. 면담내용 및 강의내용
김인수 교수와의 면담. 장로회 신학대학 대학원 5층 소회의실, 1998. 10. 22. 목요일.
한경은 권사와의 전화를 이용한 면담. 1998. 11. 9. 월요일.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이해를 통한 比較硏究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M. Div)
          김 철 웅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이해를 통한 比較硏究


        指導 김인수 敎授


 이 論文을 碩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1999년 1월  일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M. Div)
          김 철 웅


           
김철웅의 碩士學位 論文을 認准함

              主審           印
              副審           印
              副審           印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999년 1월   일

 


            謝   辭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논문이 나올때까지 거듭되는 저의 실수와 과오에도 불구하고 항상 한결같이 친절하고 자세하게 정정(訂定)의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김인수 교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부족한 저를 신대원 3년 동안 공부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도와주신 장로회신학대학 신대원 71기 졸업동기의 모든 선배 목사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아울러 임마누엘 교회의 신인현 목사님과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나이 30세가 가까워오도록 효도(孝道)다운 효도 한번 보이지 못한 이 못난 자식을 위하여 지금도 눈물로 기도하고 계실 나의 자랑스러운 아버지 김광영(金光英) 목사님과 사랑하는 어머니 최영옥(崔英玉) 사모님께 이 불효자(不孝子)의 부끄러운 논문을 무릅꿇고 머리조아려 바칩니다.

 


                                               1999년 1월  일
                                                      
                                                       김철웅

 


 

출처 : 한빛&아가페
글쓴이 : 한빛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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